여행을 떠날 때마다 …
여행은 나이에 관계없이 나를 흥분시킨다. 어렸을 때 여름방학이면 기차를 타고 충남 유성에 있는 외가에 간 적이 많이 있었다. 그럴 때면 집을 나설 때부터, 아니 그 전날부터 마음이 들떠서 잠을 설치곤 했었다. 서울역에 들어서면, 넓은 대합실에 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울려서 더 소란스럽게 들리고, 또 개찰하여 계단을 오르내리며 지정된 승강구를 향하여 증기를 품으며 서있는 기차 위를 지나갈 때의 흥분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기차에 일단 자리 잡으면 꾸려온 군것질 거리 이것저것 꺼내어 먹는 맛, 또는 시골 아주머니들이 보리밥에 시큼한 김치조각 넣고 꾸린 김밥을 홍익회의 눈을 피해 팔았었는데 그 맛 또한 천하일품이었다. 이제는 무디어져서 공항에나 도착하여야 비로소 “아! 떠나는 구나 …” 하는 내심의 탄성과 함께 바쁘게 짐들을 끌고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 일상생활의 범주에서 벗어난 홀가분한 기분과 또 알지 못하는 곳으로 향할 때의 막연한 기대감이 교차되며, 어릴 때의 그 느낌이 되 살아나는 것이다.
캔쿤(Cancun)에 도착하니 후덥지근한 날씨가 한국의 여름날씨를 연상케 한다. 이 곳은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퀸타나 루(Quintana Roo)주 동북쪽에 있는 휴양지로, 기억 자 (ㄱ) 모양으로 생긴 섬의 양끝에 다리를 놓아 본토에 연결하여, 동쪽은 알맞은 파도와 연중 따뜻한 수온의 카리브 바다, 서쪽에는 잔잔한 늪을 끼고 있어 천연적으로 물놀이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섬의 폭은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조붓하여 10분 정도 걸으면 바다에서 늪으로, 늪에서 바다로 갈 수가 있다. 바다 쪽에는 산호가 오랜 세월 부스러져 생겼다는 모래사장이 아무리 해가 쨍쨍해도 뜨거워지지 않아 한낮에도 맨 발로 다니기에 오히려 시원하다. 바닷가는 원두막 하나 자리 잡으면 그늘에 긴 의자 펴놓고 누어 책 보다, 물에 들어가 파도 타고, 뛰어 나와 시원한 주스 한잔 마시고 퍼지고 늘어지는 그런 인파로 버글버글 한다. 바닷물은 따뜻하고 그 색깔은 그림에서 보던 깨끗한 파란색이다. 멀리 파라세일이 훨훨 날고 있고 바나나보트가 대여섯의 관광객들을 태우고 푸른 물을 가르며 지나가고 있다. 반대쪽에 있는 늪은 수심이 얕고 파도가 전혀 없다.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기에 곳에 따라 물맛이 짜기도 하고 슴슴 하기도 하다. 이쪽은 젯스키, 세일보트, 카약, 수상스키 등으로 바쁘다.
대언자, 지휘자, 시범자
저녁식사를 하기로 한 식당으로 들어서니 우선 특이한 것은 냉방장치가 되어있지 않고 벽이 사방으로 터져 있는 것이다. 천장에 붙어서 나른하게 돌아가는 선풍기가 전부이다. 물가 테이불에 앉으니 늪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가끔 후르륵 지나가며 선풍기를 돕는다. 웨이터가 왔는데 세 명을 거느리고 온다. 미국에서는 아주 최고급 식당에나 가야 세 명 정도가 시중을 드는데 이건 도합 네 명이 달라붙는다. 가만히 보니 웨이터만이 영어를 하고 나머지는 그렇지 못하다. 자연히 손님 시중은 웨이터가 하고 나머지들은 웨이터를 돕는 것이다. 한 명은 마실 것 시중, 다른 한 명은 갖가지 그릇 시중, 또 한 명은 비실비실 하다가 가끔 진짜 같이 보이는 거미나 개구리를 식탁 위에 시침 뚝 따고 갖다 놓고 웃기곤 한다. 그 친구가 식사 후에는 식탁 옆에서 열심히 후식을 만드는데 보통 솜씨가 아니다. 웨이터는 이 모든 일들을 다 이미 해 본 듯 진두지휘에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우리가 어떤 부탁을 하던지 담당하는 친구에게 즉시 자기네 말로 지시를 내린다. 그 친구들은 미심쩍은 일은 모두 웨이터에게 묻는데 웨이터는 막히는 것 하나 없이 척척 잘도 해낸다.
나는 그들의 협동 체제를 볼 때 진실 된 목회자가 대언자, 지휘자, 시범자의 자세와 실력을 갖고 동역자들을 적시적소에 기용하여 최선으로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보았다. 어떻게 교회와 식당을 한데 놓고 비교 하냐고 하겠지만, 영의 양식과 육의 양식의 차이만 있다 뿐이지, 비슷한 점이 너무나도 많다. 배가 고플 때 우리는 식당을 찾는다. 영적인 갈증을 느끼고 생명의 양식을 찾는 사람들은 교회로 모인다. 집에서 만들기 어려운 음식을 먹고 싶을 때 우리는 식당으로 간다. 인생의 풀리지 않는 어려운 문제들을 짊어지고 구원의 해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교회를 찾는다. 이 비교는 주방장도 등장시키고 여러 모습의 손님과 웨이터를 소개하며 한없이 전개시킬 수 있지만 이 정도에서 그치자. 대언자의 모습은 언어의 장벽을 뚫는 일차원적인 면에서, 우리들의 영적인 필요와 주님이 주신 복음의 진수를 깊숙이 이해하고 소신껏 증거 하는 당당한 선포자의 모습으로 부상시키고 싶다. 진리를 증거하고 주님이 주신 지상명령인 복음증거를 위하여 당당히 선포하고 또 교육시키는 지도자의 모습으로 보고 싶다. 백문이 불여일견 이라는 옛말도 있듯이 솔선수범으로 앞장서는 모습으로 보고 싶다.
(2000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