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어느 집회에서 한 찬양으로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 찬양악보를 찾아서 한 번 불러보려 생각했었는데 까맣게 잊고 바쁘게 살고 있었다. 한참 후에 문득 그 일이 생각났었는데 도무지 그 찬양은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가사 중 “주는 토기장이”라는 부분이 있었던 것은 기억이 나는데 곡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몇 권의 찬양 책들을 뒤적이며 “주는 토기장이” 라는 힌트 하나 갖고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그러던 중 우여곡절 끝에 그 찬양이 “항상 진실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항상 진실케 내 맘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 주소서
주는 토기장이 나는 진흙
날 빚으소서 기도하오니
항상 진실케 내 맘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 주소서
이 찬양을 부르면 빚으신 대로 주님 닮은 삶을 살고 싶고, 또 그렇게 되기를 온통 주님께 매달려 간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흙을 빚어서 구워 낸 용기를 일반적으로 도자기라 한다. 겉이 반짝거리며 멋있고 단단한 것들을 자기, 보기에 그저 수수하고 상대적으로 푸석한 것들을 토기 또는 질그릇이라 한다. 질그릇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빚어지고 뜨거운 불에 구워서 만들어 진다. 차이가 있다면 재료와 구어 내는 온도이다. 재료라면 단순한 진흙부터 금속성분이 많이 섞이고 또 결이 아주 고운 점토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한다. 열처리도 아주 뜨거운 불에 후딱 구어서 은은한 불로 처리하는 것도 있고, 장시간에 걸쳐 중간 정도 온도에 구어 내는 것도 있단다. 마지막 처리도 유약을 발라 반짝이게 하고 또 그림을 넣어서 보기 좋게 한 것도 있고, 그저 생긴 대로 끝내는 것도 있다. 아주 좋은 재료로 보기 좋게 만든 것들을 자기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실용성이 없다. 비싼 물건이니 쓰다가 깨어질까 하여 오히려 쓰지 못하는 것이다. 그저 장 속에 넣고 쳐다만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반면에 질그릇은 깨어져도 별로 아깝지 않으니 잘 쓰인다. 화분으로 태어난 질그릇은 생명을 감싸고 싹을 내고 꽃을 피우고 또 열매도 맺는 것을 본다. 뚝배기로 구어 낸 질그릇은 맛있는 된장국을 끓이는데 쓰이기도 한다. 이 뚝배기는 열을 잘 보존하기 때문에 음식을 끓여내는데 그 가치가 더 인정된다. 옛날 같이 많지는 않지만 항아리로 구어 낸 질그릇은 김장김치 담고 장 담그는데 쓰인다. 수돗물이 들락날락 하던 시절에는 항아리에 물을 받아 채워놓고는 했었다. 이렇게 쓰임을 받는 것은 정말로 신나는 일이다. 쓰이지 않는 고급 자기 속에는 필경 거미줄이나 쳐 있을 게 뻔하다. 벌레도 잘 걸리지 않으니 거미도 굶어 죽고 그냥 거미줄만 남아있는 겉만 번지르르한 그런 자기보다는 질그릇이 천 배 만 배 좋다.

선지자 이사야는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사 64:8)”고 우리 모두가 절대적인 여호와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 받았음을 고백했다. 또한 바울 선생은 자신을 질그릇이라 고백했다. 천지만물을 지으실 때 어둠 가운데 “빛이 있으라” 말씀으로 지으신 하나님이 죄로 어두워진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금 빛을 비추시고 그 빛을 볼 수 있는 마음까지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고후 4:6). 오로지 허락하셨기에 얻은 복음의 진리를 바울은 보배라고 고백했고, 또 그 보배를 품고 있는 자신을 질그릇으로 비유 했다 (고후 4:7). 받은 복음에 비해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다는 고백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주신 은사 또한 보배임을 느낀다. 주님이 질그릇을 빚어내실 때 은사라는 보물을 살짝 넣어서 구워내신 것이다. 그런데 이 은사는 처음에는 없는 줄 알았다가 찾아내어 쓰면 쓸수록 요 것 조 것 더 많이 나오는 신기한 보배이다. 허술한 질그릇인줄 알고 쓰는데 복음의 보배를 간직하고 있어 놀라게 하고 또 각양 은사가 나타나니 그 질그릇을 이조백자와도 바꾸지 않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이 다 이 질그릇 같으면 좋겠다. 겉모습도 수수하지만 사귈수록 보배들이 흘러나와 구수하고 새로 난 속 사람이 더욱 아름다운 그런 사람들 말이다. 겉모습은 옷맵시나 화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깊이 사귀기 전에 알 수 있는 좋은 인상,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순수한 믿음의 모습과 아름다운 삶의 모습, 조건 없이 섬기는 모습들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한데 모아 그리스도인의 향기라고 한다. 보배를 간직하고 있으면 절로 우러나오는 그런 향기 말이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생각과 말이 거센 사람들도 있는데 옆에 있으면 불편하기만 하다. 그런 것들은 다 버리고 주님이 주신 보배만을 간직하여 곁에 가면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그런 그리스도인도 있고.
뚝배기 보다 장맛이라는 우리 격언이 있다. 그런데 장맛이 좋으면 그 뚝배기도 대접받고 좋아 보이는 것이다. 반대로 장맛이 안 좋으면 “뚝배기가 투박하기도 하네” 하고 핀잔 듣는다. 우리는 아주 좋은 보배, 주님의 복음과 은사를 받았다. 그 보배들을 잘 간직함으로 쓸만하고 대접받는 질그릇이 되어 진짜로 쓰임을 받는 것이다. 주님, 그 보배들을 잘 간직하고 주님 닮는 삶 살게 이끌어 주세요.
주는 토기장이 나는 진흙
날 빚으소서 기도하오니
항상 진실케 내 맘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여 주소서
(1998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