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적 축복

거의 30여 년 전에 첫 번째 집을 장만할 때에 지금 기억으로 서너 장 정도의 서식에 서명을 했던 기억이다.  요새는 최소한 30여장에 달하는 계약서에 서명하는데 이 모두가 사고 파는 사람과 그 일을 중계하는 이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의무를 확인하기 위한 것들이다.  재미있는 것은 각 서식에 수많은 조항이 있는데 매 조항마다 그 이면에는 법원으로까지 번진 소송사태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도 이러한 조항에 없는 일들로 논쟁하고 고소하고, 그래서 주택매매계약서는 더 복잡해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일반적으로 계약서는 서로가 이행하기로 한 일들을 문서화하여 증거로 갖고 있으며 어느 편에서든지 그 일을 지키지 않았을 경우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근거로 법적인 효력이 있는 것이다.  최근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분노를 자아내었던 AIG Bonus 사건도 그 이면에는 계약이라는 구실(excuse)이 있었음을 뉴스를 통하여 우리는 알고 있다.  보통 계약서는 최소한 연관된 쌍방으로부터 각 편을 대리 또는 증명하는 사람(또는 법인내지는 공동체)까지 포함하여  작성된다.  또한 계약서에는 많은 조건들이 나열되어 있으며 조건이 충족되었을 경우와 그렇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세부사항들이 포함되어있다.

반면에 약속은 어떠한가?  보통 구두로 하기 때문에 언약이라고도 하며 서로가 믿는 관계에서 성립된다.  조건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약속을 잘 지키지 않으면 법적인 제재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관계에 금이 가거나 신뢰를 잃기 마련이다.  어렸을 때는 약속하면서 손가락을 걸기도 했는데 미국에서는 악수를 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많이 하는 약속은 시간 약속인데 아무 생각 없이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유독 한국인에게 많아서 Korean Time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표현까지 생겼다.  시간을 상습적으로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도는 점차로 줄어들어 나중에는 다른 일에도 별로 믿음이 가지 않게 마련이다.  이런 시간 약속도 서로 만나야겠다는 조건이 충족되어 이루어진다.  부모가 자녀에게 공부 잘 하면 무엇을 해주겠다는 것도 약속이다.  공부를 잘 못했다고 벌금을 물리거나 고소하는 부모는 없다.  TV 보는 시간이나 친구 만나는 걸 줄이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부모이기 때문에 자식과의 관계가 깨어지거나 그런 일은 드물다.  물론 너무 세게 밀어붙이는 부모에게 자식들이 부담을 느껴서 삐딱해지는 경우는 있지만 …

고대 유대인들의 약속은 좀 별난 데가 있었다.  예레미야 34장 18절부터 20절까지에 기록된 소위 쪼개는 언약의 예식을 치룬 것이다.  짐승을 반으로 쪼개어 놓고 그 사이로 약속의 당사자들이 지나가며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만일 어느 편에서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쪼개어진 짐승과 같이 쪼갬을 받아도 좋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약속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정확히는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하실 때 바로 이 예식을 택하셨다.  창세기 15장 7절부터 17절에 기록된 일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하나님 홀로(17절의 횃불) 쪼개어 놓은 짐승(암소, 암염소, 수양) 사이를 지나가셨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이 무엇을 하면 그 것에 대한 대가로 축복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축복을 약속하신 것이다.  히브리서에 6장에 이 약속에 관해서 잘 설명되어있다.  13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라고 기록되어 있고 순서가 좀 바뀐 감이 있지만 16절에 보면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라고 기록되어있다.  14절에 기록된 그 약속의 내용은 “…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이다.

미국의 경제가 뒤뚱거리는 가운데 우리 모두가 경제적인 불안함과 어려움 가운데 있다.  상처 받은 마음으로 또는 병약한 육신으로 좌절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며 주님 안에 거할 때 우리들은 위로를 받고 소망을 갖게 된다.  히브리서에 6장 17절로부터 20절까지의 말씀을 묵상하며 이 단상을 마무리 진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며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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