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unication의 백금률

한국 사람이던 아니던 관계없이 막무가내 한국말로, 그 것도 사투리로, 해대는 어느 할머니가 LA 한인 타운의 버스정거장에 헐레벌떡 도착했다. 버스를 놓쳤는지 궁금한데 마침 웬 백인 할머니가 기다리고 있으니 습관대로 사투리로 말을 건넸다. ‘왔데이?’ 그런데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고 묻는 줄로 알아들은 이 백인 할머니는 마침 월요일임으로 ‘Monday’하고 대답했다. 뭐가 왔었냐고 묻는 거냐고 되물은 것으로 들은 이 사투리 할머니는 ‘버스데이’라 대답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백인 할머니가 아 오늘이 이 사람 생일이구나 생각하고는 ‘Happy Birthday!’하는데 마침 기다리던 버스가 오니 둘이 같이 버스를 탔다. 사투리 할머니는 말동무도 해준 백인 할머니가 고마워 ‘고맙데이’하니 무슨 날이라고 했는데 잘 못 들은 줄 안 이 백인 할머니는 ‘What day?’하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마침내 버스가 왔다고 말 한 것으로 알아들은 이 사투리 할머니도 ‘왔데이’ 대답하고 각자 행선지로 잘 갔다고 한다. 동문서답 치고는 그럭저럭 communication을 한 경우인데 서로가 선한 마음으로 말을 주고받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성경에서 동문서답의 시초는 아담과 하와였다. 선악과를 따 먹은 후 두려워서 숨은 이들에게 하나님은 왜 숨었냐고 물으시니, 아담은 먹지 말라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분부를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었기에 숨었노라 대답하지 않고, 벌거벗어 두려워서 숨었다고 짐짓 핵심을 피한 대답을 한다. 벌거벗은 부끄러움은 선악과를 따 먹은 결과로 알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둘러대도 하나님께서 모르시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창세기에서 동문서답의 절정은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이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실 때 벌어졌다.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하고 대답한 것이다. 이 동문서답은 communication이 전혀 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슬프시게 했고 노하시게 한 경우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던 자들이었지만 그 마음에 악한 생각이 들어가니 이렇게 된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communication의 매체는 너무나 다양하다. 예전에는 편지가 고작이었지만 지금은 전화, email, IM/문자,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보았던 화상전화까지 말이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으로 직접 1:1의 communication에서 다수가 동시에 직간접으로 communicate할 수 있고, 상대방이 바로 답할 경우, 즉각적으로 답을 받아볼 수 있는 그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들의 communication은 그 폭은 분명히 넓어지고 있는 느낌인데 그 깊이는 과연 기술의 발전과 같이 깊어지고 있는가? 전화의 음질이나 화상전화의 화질이 더 선명해진 것같이 우리들의 의사도 100% 선명하게 전달되고 있나? 나는 분명히 하얀 색이라고 했는데 상대방은 까만 색이라고 듣는 경험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하고 있나? 나의 한 마디 말에 상대방의 기분을 완전히 상하게 만든 경험은 없는지? 저 사람과는 아예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나?

Communication의 백금률(Platinum Rule)이라는 표현을 얼마 전에 들었다. 백금은 황금보다 더 비싼 귀금속이다. 그래서 credit card도 gold card가 예전에는 가장 좋은 것이었는데 요새는 platinum card가 제일 좋단다. Platinum은 흰색의 금인데 여기서 반대로 튀어서 black card도 있다나? 그래서 백금률은 황금률보다 한 단계 더 격상한 어떤 원리를 뜻한다. 여하간 ‘황금률’은 여러 방면에 적용되는데 그 분야에서 가정 으뜸되는 원리원칙을 뜻한다. 영어사전에서 Golden Rule을 찾아보면 윤리적 품행의 원리로 마태복음 7장 12절이나 누가복음 6장 31절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백금률은, 아직 사전에까지는 나오지 않지만 이 방면에서는 자주 쓰이는 표현인데, ‘남이 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이다. 황금률은 반대급부를 기대하는 면이 있지만 백금률은 그냥 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황금률로는 상대방으로부터 존중 받기를 원하면 먼저 그 상대방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나를 존중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서부터 관계가 어려워지기 시작하겠다. 그러나 백금률로 반대급부의 기대 없이 그냥 존중하면 상대방의 반응으로부터 자유 할 수가 있다.

예전에 들었던 대화의 황금률은 우선 대화의 내용이 사실이어야 하고, 필요한 내용이어야 하며, 친절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이 아니면 말하지 말 것이며, 사실이라도 상대방에게 또는 그 자리에 불필요한 말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이며 필요한 말이라면 친절하게 예의를 갖추어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사실도 아니고 필요하지도 않은 말을 화를 내며 했다고 가정하자.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있다. 때로는 ‘아니 이 사람이?’하며 경악을 금치 못한 그런 경험도 우리는 가끔 한다. 그런 사람에게 존경과 신뢰가 갈까? 그런 사람과 대화하고 싶을까? Communication의 황금률로 보면 ‘그런 사람에게는 대접을 받기도 싫으니까 대접 안하고 말지’하고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백금률은 그런 사람도 대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만 그렇게 하실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사람이기에 백금률을 무조건 적용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백금률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서로간에 신뢰가 있어야 하겠다. 그런데 신뢰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서로의 노력으로 쌓여가는 것이다. 먼저 인격적으로 서로 존중하여야 하겠다. 인격적인 존중은 말투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을 대하는 모든 언행심사에 나타난다. 우리는 영적으로 지음 받았기에 상대방의 심중도 어느 정도 읽을 수가 있다. 인격적인 존중의 예를 몇 개 생각해본다. 우리가 어렸을 때 편지 떼어먹으면 후레자식이라고 했었다. 소위 믿을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답변을 필요로 하는 communication에는 가능한 한 빨리 회답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이건 예의이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며, 인정해주고 칭찬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 말 할 때에는 상대방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요새 한국에서 유행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갑’이 ‘을’에게 말하듯 하면 빵점이다. 이런 일련의 노력으로 서로를 신뢰하게 되면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사이가 되겠다.

잠언은 대부분이 솔로몬에 의해서 씌어졌고 아굴과 르무엘, 그리고 저자를 알 수 없는 글 등을 모아서 이루어진 시가서 또는 지혜서로 분류되는 책이다. 잠언의 주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삶을 살 때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로움과 사악함, 지혜로움과 어리석음, 근면함과 나태함, 겸손함과 거만함 등등의 서로 반대되는 삶의 모습들을 대조적으로 나열하고 그 특징과 결과를 언급함으로 훈계하고 읽는 자들로 하여금 지혜로운 삶을 누리도록 이끄는데 그 목적이 있다. 잠언은 인간의 언어 생활을 많이 다루고 있는데 유난히 12장 13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이 들어와 묵상해본다.

13절 –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말미암아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리라. 이 악인이라는 단어가 좀 쎈데 영어성경에는 wicked man 또는 evil man으로 되어 있다. Wicked라는 단어는 ‘심술궂은’ 또는 ‘장난끼가 있는’이라는 좀 완곡한 뜻이 있는가 하면 ‘사악한’ 또는‘악의에 찬’이란 강한 뜻도 있다. 여하간 악인은 심성이 곱지 못한 사람을 말하는데 이런 사람은 남에게 트집 잡기를 좋아하고 남을 공격하기를 좋아한다. 그런 사람은 결국 자기가 한 악한 말들에 스스로 옭매여서 헤어날 길이 없는 반면 의인은 어떤 공격으로 어려움에 빠지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자신의 정직함과 하나님의 강력하신 보호하심으로 그러한 어려움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화에 임할 때에는 항상 선한 마음과 의로운 생각으로 임하여야 하겠다.

14절 – 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 의인은 그의 선한 말과 선한 행동으로 인해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과 하나님이 베푸시는 형통과 안전의 은총을 누린다.

15절 –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미련한 자는 자기가 항상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의 권고를 전혀 듣지 않는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회의문화가 서양사람들에 비해서 많이 뒤떨어진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사회구조가 오랫동안 수직적으로 되어 있었기에 회의에서 constructive criticism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렇기 때문에 synergy효과도 전혀 볼 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 100이라는 성능을 갖은 기계를 2개 연결하면 200이라는 성능이 나온다. 그런데 사람은 100의 능력을 갖은 2 사람이 함께 일하면 50의 능력이 나오는 게 고작이다.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다 기분 상하여 상승효과를 못 보는 것이다.

16절 –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미련한 자는 조금만 기분이 나빠도 즉시로 화를 내어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만 슬기로운 자는 그보다 더한 모욕을 당해도 그 순간을 잘 참아내고 적절한 때를 기다려 의로운 이야기로 해결한다.

17절 – 진리를 말하는 자는 의를 나타내어도 거짓 증인은 속이는 말을 하느니라.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낸다. 진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말 할 필요가 없지만 거짓을 말한 자는 그 거짓 때문에 또 다른 거짓말을 하게 된다.

18절 –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무시하고 함부로 말하는 자는 상대방을 칼로 찌르는 것과 같아 상대방을 아프게 하고 그 상처가 오래 가지만 지혜로운 자의 말은 오히려 위로하고 치유하여 새 힘을 얻게 하는 좋은 보약과 같다.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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