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목요일 점심때쯤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중고등 학교를 같이 다니고 50년 이상을 함께 사귀어 온 한 친구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였다. 그런데 이게 왠 말인가? 내일 모레가 그 친구 아들의 결혼식 아닌가? 그런데 친구는 병원에 갈 때 어떤 감이 들었는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아들의 결혼식은 치르라는 부탁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식은 예정대로 하게 되었다. 이 문제로 고민하며 친구의 가족들이 의논하고 내린 결정이다. 조카의 결혼식에 오신 친구의 형님과 누님들은 별안간 동생의 장례식까지 보게 되었으니 참으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토요일의 결혼식은 정말로 아름다운 결혼식이었다. 예식이 시작되자 친구의 조카와 둘째 아들이 오늘만큼은 외삼촌과 아버지의 뜻에 따라 형의 결혼을 마음껏 축하해 달라는 간결한 광고에, 마음 한 구석에 맷돌같이 달려 나를 끌어당기던 무거운 감정을 떨어버릴 수 있었다. 보통 때 보다 더 많이 참여한 친구들로부터 더 큰 축복이 넘쳐나는 결혼식이었다. 성혼선서가 끝나고 새로이 탄생한 부부가 갑자기 혼자된 어머니에게 인사하는 순서에서 콧날이 시큰해지며 주르르 흐르는 눈물은 나 뿐이 아니었다. 주일과 월요일의 장례일정을 마치고 이제야 나도 정신이 드는데 친구의 아내는 얼마나 힘들까?

그 친구와 나는 같은 해에 미국에 왔다. 같은 해에 결혼도 했다. 우리는 연초에 결혼했고 그 친구는 그 해 가을쯤에 했다. 나의 아내가 먼저 도착하여 우리가 studio apartment에서 살 때 처음으로 방문해준 사람이 바로 그 친구였다. 그 때 선물로 준 쟁반을 우리는 아직도 쓰고 있는데, 친구들 중 유일하게 내 아내를 first name basis로 불러주는 친구였는데, 그 친구의 아내가 도착하여 함께 만났는데 직접 쓴 아내사랑의 시를 읽었던 친구! 그 많은 50년의 추억들을 다 어떻게 일일이 끌어낼 수 있겠는가? 친구여!

학교, 특히 중고등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을 친구라 한다.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동료(同僚)라고 부른다.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교우(敎友)라고 한다. 친구는 언제 만나도 시공(時空)을 훌쩍 뛰어넘어 담박에 옛날로 돌아가는 특징이 있다. 졸업하고 45년이 지난 후에 만나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얼굴에 이름만 가져다 부쳐놓으면 금방 이놈 저놈하며 흉허물이 없어지는 게 친구다. 직장동료는 일을 위해서 협력하지만 경쟁상대이다. 때로 기분 상하는 일이 있어도 ‘It pays the bill.’하고 참는다. 정 기분 나쁜 일이 생기면 집어치우고 다른 일을 찾는다. 많은 경우 더 좋은 대우와 기회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된다. 동료라는 말에 포함되어 있는 ‘함께 한다’는 뜻이 매우 한정적인 것이 실상이다. 그러면 교우는 어떤가? 국어사전에 보면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을 벗으로 일컫는 말’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렇다면 개신교를 믿는 우리들은 개신교 성도들 모두가 친구여야 한다. 그러나 교우의 ‘교’자가, 한문은 같지만 그 뜻으로 보면, 종교의 ‘교’자가 아니고 교회의 ‘교’자로 쓰이는 것을 본다. 다시 말하면 같은 종교가 아니고 같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을 벗으로 일컫는 말로 쓰이는 것이 실상이다. 어느 교회를 다니다 사정상 교회를 옮기게 되면 그 벗의 관계가 깨어지고 서먹해지는 것을 종종 본다. ‘사랑하는’ 그리고 ‘섬기는’ 등의 표현을 더해가며 사귀는, 가장 아름다운 관계가 되어야 할 교우들 간의 관계가 참 이율배반적인 것을 느낀다. 때로는 교우라는 특수한 관계를 이용하는(take advantage) 사람들도 보게 되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우리의 참 친구는 예수님 밖에 없다. 그 다음 친구가 우리에게는 과연 누구인지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2013년 10월)

1 Comment

  1. 처음 홍욱의 blog에 들어 왔는데 병식이의 이야기로 숙연해진다. 그 친구와는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녔는데 미국에서도 서로 관련된 회사일로 지난 몇년 간 휴스턴에서 자주 만났었는데 … 지나간 국민학교 시절의 여자애들
    얘기로 부터 서울의 동기들 얘기까지 낄낄대며 늦은 시간들을 보냈었지.

    언제나 누구에게나 편안함을 끼치던 좋은 친구, 메마른 세상에서 쉴만한
    물 가와 푸른 초장으로 함께 나가 자리를 펴던 친구.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제 우리는 Metamorphosis를 바라본다. 떨어진 한 알의 씨앗이 놀랍고도
    아름답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피어나고 있음을. 아시는 분들은 아시리라.
    모르시는 분들은 아시기를.

    친구야, 다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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