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1) 음악가들의 묘지

비엔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로 오스트리아의 경제, 문화, 정치의 중심 도시이다. 또한 비엔나는 많은 음악가들(슈베르트, 슈트라우스, 등)을 배출하였고 외부로부터 온 음악가들(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리스트, 쥬페, 브람스, 부르크너, 말러 등)과 함께 그들의 왕성한 활동무대였기에 음악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또한 정신분석학의 선구자인 프로이트의 고향이기에 꿈의 도시라고도 알려져 있다. 비엔나는 합스부르크 왕조, 신성로마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을 거치며 수도로써 번성하였고 1차대전 후에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수도로 자리 맥임을 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히틀러가 1938년에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후 수도를 베를린으로 옮겼으며 독일의 점령하에 있을 때 적극적으로 독일 편을 들었기에 2차대전 중 연합군의 공격으로 비엔나는 많은 피해를 입었다. 2차대전 후 승전국인 미국, 영국, 불란서, 소련이 공동으로 오스트리아를 통치하게 되었는데 소련이 동 베를린을 봉쇄한 데 자극을 받은 서방 연합군들의 압력으로 소련은 비엔나를 포함한 동 오스트리아에서 철군하며 오스트리아는 중립국으로 다시 태어났다.

비엔나에는 많은 유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음악의 도시이니 음악가들의 묘지를 먼저 찾게 되었다. 공동묘지인 이 곳에는 유독 음악가들의 묘가 많아서 그런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진짜 이름은 중앙묘지(Zentralfriedhof, Central Cemetery)이다. 이름과 달리 묘지는 비엔나 시 중앙에 있는 것이 아니고 비엔나의 행정구역인 Simmering에 위치해 있다. 음악가들의 묘지를 중심으로 한 비엔나 외곽 지도 – Interactive Google Map, click View Large Map for a full screen map

음악가들의 묘지가 시작되는 부분에 있는 모차르트 기념비를 중심으로 왼쪽에 있는 베토벤의 묘와 오른쪽에 있는 슈베르트의 묘. 모차르트의 묘는 St. Marx Cemetery에 있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엄청 존경하여 베토벤 옆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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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묘 (세례일 12/17/1770 – 3/26/1827) 독일 본에서 태어난 베토벤은 정확한 생일이 알려져 있지 않다. 베토벤은 성악가인 아버지로부터 엄한 음악교육을 받았으며 후에 하이든으로부터 사사를 받았다. 그는 비범한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아 비엔나로 유학을 가게 된다. 마침 모차르트가 죽은 후였는데 혜성같이 나타난 20세를 갓 넘긴 베토벤은 귀족들의 살롱에서 즉흥연주로 인기를 얻게 된다. 개성이 강한 그는 선배들과 같이 귀족에게 예속된 음악가가 아니고 그들과 교제하며 후원을 받는 당당한 음악가로 서게 된다. 이상적인 여성형을 항상 갈구하며 열띤 연애감정을 갖고 살았는데 독신으로 일생을 마친 그는 자유분방하고 이상을 추구하며 살았던 음악가였다. 20세 후반부터 귓병에 시달려 온 그는 청력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는데 음악가에게 그런 처절한 숙명과의 투쟁은 괴롭기 한이 없는 것이었다. 비엔나 외곽도시 하이리겐슈타트(Heiligenstadt)에 살던 그는 마침내 1802년에 그 유명한 ‘하이리겐슈타트의 고백’을 쓰게 되는데 절망에 빠져 자살까지도 생각한 것으로 시작한 이 고백은 오히려 음악을 통하여 음악을 위해서 살아 남겠다는 결심으로 끝을 맺고 있다. 베토벤은 이 외에도 폐병, 관절염, 황달, 안질까지 걸려 고통을 받게 되는데 작곡가로써의 재능에는 오히려 더 날카로움과 원숙함이 더해가고 있었다. 1814년경부터는 완전히 귀가 먹어서 글로만 대화가 가능했으며 1824년에 교향곡 제 9번의 초연을 총 지휘한 그는 청중의 열렬한 환호도 못 들은 채 서있었는데 독창자의 인도로 돌아서서야 비로서 열광하는 청중을 보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로부터 3년 후에 그는 고독하게 죽었는데 갖가지 병에 시달렸지만 인간의 무력함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존엄함을 확신하였고 숙명으로부터의 해방과 경건한 신앙 안에서 우주적인 인간의 존재를 확인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9개의 교향곡, 5곡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도 5번 황제,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 외에도 많은 피아노 쏘나타, 현악 중주곡 및 합창곡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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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의 묘 (1/31/1797 – 11/19/1828) 비엔나에서 국민학교 교장의 아들로 태어난 슈베르트는 환락적인 도시 비엔나와 낙천적인 오스트리아 인의 성격을 그대로 타고 난 사람이었다. 음악가는 아니었지만 음악적 재능이 있는 아버지로부터 기본적 교육을 받은 슈베르트는 6살 때부터 아버지와 형으로부터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7살부터 비올라를 맡아 형들과 함께 현악4중주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성악에도 재능을 인정받아 11살 때 비엔나 황실부속신학교(Stadtkonvikt)에 입학하여 합창단원으로 뽑히는데 지금도 유명한 비엔나 소년합창단의 전신이었다. 변성기까지 5년을 이 학교에서 음악교육을 받으며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 거장의 음악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황실부속신학교를 떠날 때 16살의 나이에 이미 첫 번째 교향곡을 작곡할 만큼 관현악에 대한 소양을 습득한 것이다. 젊은 나이에 하이든의 쾌활함, 모차르트의 선율성, 베토벤의 설득력 등의 음악성을 흡수 소화한 것이다. 그 후 아버지의 권유로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는 학교에서 임시교사 노릇을 잠시 하였는데 이때부터 작곡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작곡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고 타고난 성정대로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였다. 꿈에도 존경하던 베토벤을 그가 죽기 1주일 전에 만나게 된 슈베르트는 자신이 작곡한 곡을 몇 곡 보여주었는데 베토벤이 극찬하였으며 일찍 만나지 못했음을 몹시 아쉬워했다 한다. 그 후 약 1년반만에 슈베르트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32년이라는 짧은 생을 마감한다. 슈베르트는 600여곡의 가곡을 작곡하여 ‘가곡의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8곡의 교향곡과 소나타, 오페라 등을 작곡했다. 그의 교향곡 8번은 4악장까지의 교향곡 형식에서 2악장까지 작곡이 끝났고 3악장은 초고, 4악장은 전혀 없기에 일명 ‘미완성 교향곡’으로 알려져 있다. 가곡 중에는 ‘송어’, ‘겨울여행’,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소녀’, ‘백조의 노래’, ‘마왕’, 아베마리아’ 등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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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슈트라우스 2세(10/25/1825 – 6/3/1899)와 그의 세 번째 부인 Adele의 묘.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아들인 그는 400여곡의 왈츠를 작곡하여 왈츠의 왕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요한 슈트라우스’하면 이 아들을 칭한다. 비엔나 근교에서 태어난 슈트라우스는 그가 은행가가 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로 음악공부를 하지 못했다. 일설에는 아들의 재능이 자기보다 월등한 것을 알아차린 아버지가 그의 데뷔를 꺼려했다는 주장도 있다. 여하간 아버지 몰래 바이올린과 음악이론을 공부한 슈트라우스는 부모가 이혼한 후에야 비로소 공개적으로 음악활동을 할 수 있었다. 조강지처와 사별한 후 두 번째 결혼은 성격차이로 곧 파탄에 이르렀고 그의 음악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세 번째 부인과 함께 말년을 보내게 된다. 왈츠로 ‘푸른 다뉴브 강’과 ‘비엔나 숲 속의 이야기’, 오페레타로 ‘박쥐’ 등을 그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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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의 묘 (5/7/1833 – 4/3/1897)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브람스(1833 – 1897)는 비엔나에서 음악가로써 활동하였으며 바흐(1685 – 1750), 베토벤(1770 – 1827)과 함께 18세기로부터 19세기를 연결하여 풍미한 3B 중 마지막 음악가로 알려져 있다. 이름없는 악사의 아들로 태어난 브람스는 소년시절부터 댄스 홀에서 피아노를 치며 어려운 가사를 도왔다. 성실한 그는 음악이론을 열심히 배웠으며 이는 그의 음악이 매우 전통적인 구조와 화성에 입각하게 되는 밑 거름이 되었다. 20세에 당시 유명한 바이올린 주자 레미니(Reményi)의 반주자로 발탁되기에 이른다. 연주여행 중 당대 피아니스트로 최고의 명성을 날리던 리스트(Liszt)를 만나게 되고, 뒤셀도르프 시립교향악단 지휘자 슈만(Schumann)을 만나게 된다. 슈만은 브람스의 음악을 극찬하였고 이로써 브람스는 유망한 신인으로 각광을 받게 된다. 브람스는 자기보다 23세나 나이가 많은 슈만과 그의 아내 클라라(Clara)와도 각별한 사이로 지내던 중 슈만이 라인 강에 투신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이 후로 브람스는 클라라를 물심양면으로 돕는데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억측이 구구하다. 30세가 되며 비엔나를 방문한 브람스는 그 곳에 정착하여 인생의 후반부를 보내게 된다. 그의 작품은 성악곡과 기악곡이 거의 반반(半半)이며 교향곡은 4편이 있다. 특히 그의 교향곡 1번은 20여년에 걸쳐 작곡한 곡으로 베토벤 교향곡 10번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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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페의 묘 (4/18/1819 – 5/21/1895) 주페는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였던 스파라토(Spalato, 지금은 Croatia의 Split)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성당의 성가대 지휘자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았다. 소년시절을 이태리의 크레모나(Cremona)와 파두아(Padua)에서 지낸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을 공부하며 플룻과 성악도 함께 사사 받았으며 오페라 가수로도 활동했다. 그러던 중 비엔나에 있는 오페라 극장의 초대로 비엔나로 이주하게 된다. 이 극장에서 지휘를 맡게 된 주페는 대중공연용 오페레타를 직접 작곡하기 시작했다. 높은 수준의 음악성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고전음악이 위주였고 리스트나 파가니니와 같은 천재 연주가들이 각광을 받던 당시 대중들의 가볍고 감미로운 음악에 대한 요망을 주페가 충족시켜 준 것이었다. 이미 이태리에서 시작된 오페레타(대중을 위한 소규모 오페라)와 희극의 열풍을 주페는 비엔나로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좀 더 대중적인 음악으로 비엔나에서는 주페와 요한 슈트라우스, 파리에서는 오펜바흐 이렇게 3사람이 이름을 남기게 된다. 주페는 30여곡의 오페레타와 180여곡의 희극 및 발레 곡을 작곡했는데 ‘시인과 농부’와 ‘경기병’의 서곡들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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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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