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양화진 선교사묘원에 있는 선교사들 (2)

아펜젤러 – Henry Gerhart Appenzeller, 한국이름 아편설라(亞篇薛羅), 1858 – 1902, 한국활동 1885 – 1902: 한국에 감리교 초석을 놓은 교육 선교사

감리교계통의 신학교에 재학 중 조선선교를 지망한 아펜젤러는 조선으로 오기 위해서 일본을 경유했는데 거기에서 언더우드를 만나게 되었다. 함께 에도 시대에 있었던 천주교도 학살 현장인 시마바라 반도를 순례하게 되었는데 당시 상당 수의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들이 죽는 순간까지 ‘조선에 복음이 전해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선을 위해서 목숨 바칠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 항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곧바로 정동에 사저를 마련하고 영어교육을 시작하였는데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학교이름을 하사 받았다. 곧 이어서 조선인들을 위해서 예배를 드리고 성찬예식을 거행했는데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교회의 시작이었다. 또한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라는 토론회를 조직하여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와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삼문출판사를 설립하여 기독교 책자와 독립신문을 출간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언더우드, 스크랜턴과 함께 성경번역위원회를 조직하여 한글성경 번역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가던 중 타고 가던 배가 침몰하여 소천하였는데 탈출할 수도 있었지만 선실에 갇힌 여학생을 구하려 다시 들어갔다가 빠져 나오지 못한 것이었다. 시신을 찾지 못하여 양화진에 있는 그의 묘는 빈 무덤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들 Henry Dodge Appenzeller는 배재학당의 교장과 이사장을 역임했고 딸 Alice Rebecca Appenzeller는 이화학당의 교장을 역임하며 전문학교로 승격시키고 현 신촌으로 학사를 이전하였다.

왼쪽의 검은 대리석 묘비가 아버지 Henry Gerhart Appenzeller의 가묘이며 오른쪽의 흰색 비석은 아들 Henry Dodge Appenzeller와 며느리 Ruth Noble Appenzeller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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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Alice Rebecca Appenzeller의 묘

Alice Rebecca Appenzellar

스크랜턴 – Mary Fletcher Benton Scranton, 1832 – 1909, 한국활동 1885 – 1909: 한국 여성 교육의 선구자

52세 때 미국 감리회로부터 조선선교사로 파송 받아 아들 내외와 함께 조선에 온 스크랜턴 부인은 자신의 집에서 학당을 세워 여자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화여대의 시작이었다. 처음의 의심과 불신을 이겨내 마침내 학생 수도 늘었고 조정에서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으며 기초교육 및 기독교교육을 한글과 영어로 가르쳤다. 안식년을 고향에서 보낸 그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전도부인회를 조직하여 전국을 다니며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도합 24년을 조선의 여성들을 위하여 헌신한 선교사였다.

왼쪽은 스크랜턴의 묘비, 오른쪽은 이화의 창립부터 신촌으로 이전까지 공헌한 Mary F. Scranton, Rosetta S. Hall, Josephine O. Paine, Mary R. Hillman, Alice R. Appenzeller 5명 선교사의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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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 – Hall: 2대에 걸친 의료선교사 집안

2대에 걸친 홀 가(家)와 한국과의 인연은 어머니 로제타 홀(Rosetta Hall, 1865 – 1951, 한국활동 1890 – 1935)의 의료선교로 시작되었다. 의대를 졸업하고 뉴욕의 빈민가에서 의료봉사를 하던 로제타는 한국에 여의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 행을 결심하였다. 이 때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며 중국 의료선교를 준비 하던 캐나다 출신의 윌리엄 홀(William Hall, 1860 – 1894, 한국활동 1891 – 1894)이 로제타의 성품에 반하여 청혼하였지만 서로의 선교지가 다르고 더더구나 선교를 포기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기에 로제타는 그의 청혼을 거절하였다 한다. 1890년에 드디어 로제타는 미 북감리회의 파송으로 한국에 도착하였는데 홀로 남은 윌리엄은 우여곡절 끝에 선교지를 한국으로 바꾸어 1891년에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892년에 둘은 결혼하게 되는데 한국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이었다. 홀 부부는 한 살도 채 안된 아들 셔우드(Sherwood, 1893 – 1991, 한국활동 1926 – 1941)를 데리고 평양으로 가는데 온갖 핍박 속에서도 교회를 개척하고 의료선교를 하였다. 그러던 중 청일전쟁이 일어나 많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윌리엄은 자신도 전염병에 걸려 서울로 후송되었지만 바로 숨을 거두고 만다. 이 때 로제타는 둘째 아이 에디스(Edith, 1895 – 1898)를 밴 상태였다. 남편을 잃어 상심한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에디스를 낳았지만 두 자녀를 데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남편의 사역지였던 평양에 홀을 기념한다는 뜻으로 기홀병원을 세우고 의료사역에 전념하던 중 어린 딸 에디스마저 이질에 걸려 하나님 곁으로 떠나는 아픔을 겪게 된다. 로제타는 오로지 주님에 대한 사랑과 한국인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이 모든 고통을 참아내었다. 한편으로 교인의 자녀 중 장님이 있었는데 이를 딱하게 여긴 로제타는 맹인학교를 세우고 한국 최초로 점자를 개발하고 교육하게 되었다. 아들 셔우드는 아버지의 고향 캐나다로 돌아가 의대를 졸업한 뒤 역시 의사인 부인 메리언(Marian)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의료선교를 하였는데 특히 폐결핵 치료에 주력하여 결핵환자 요양원을 세우고 한국 최초로 크리스마스 씰(Seals)을 만들어 결핵환자들을 도왔다.

홀 가의 가족 묘와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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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hur Turner (1862 – 1910): 한국 YMCA의 발전에 기여한 선교사

영국 옥스포드 대학 출신인 터너는 성공회에서 사제로 봉직하던 중 조선에 파송 되어 한국 성공회의 2대 주교가 되었다. 당시 성공회는 인천을 중심으로 선교하고 있었는데 그가 주교가 된 후 경기도와 충청도까지 선교의 영역을 넓혔다. 터너는 특별히 한국 YMCA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한일합방 후 YMCA회원들을 추축으로 항일운동을 격려하였다. 앞줄 왼쪽의 십자가가 터너의 묘. 왼쪽 끝에 있는 검은 대리석은 성공회 주교로 한국에서 1926년부터 1967년까지 섬긴 Arthur Chadwell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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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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