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이단사교(異端邪敎)와 교주(敎主)

기독교에서 이단과 사이비(似而非)또는 유사 종교를 가리는 가장 쉬운 기준은 예수님의 재림을 몇 날 몇 시로 예언하거나 자신이 재림예수라 사칭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그런 주장을 펴는 자(교주)에게 재정적인 혜택이 돌아가는 경우이다. 80년대 말 또는 90년대 초라고 기억되는데 LA 지역의 한 이단교회가 말세를 선언하고 추종자들에게 재산을 정리해서 교회에 헌납하게 하고, 학생들은 학교를 직장인들은 직장을 고만두고, 모두 모여서 기도만 하여야 한다고 설파했던 사건이 기억난다. 물론 말세라고 예언한 날 아무 일도 없었고 교주는 돈만 챙기고 잠적한 사건이다. 신기하게도 그러한 이단 사설에 넘어간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는 뉴스 보도를 접하며 실소했던 기억이다.

그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경우는 교묘한 교리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경우인데 평신도들이 보아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형편없는 경우로부터 정통교단에서 연구 발표한 것들을 보고서야 알 수 있는 그런 경우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타락은, 표면적으로 내 세우는 교리는 정통적이지만 그 적용에 있어서 지극히 인본주의와 세속주의로 치우치고, 목사가 거의 교주와 같이 행세하며, 교권 장악, 목회 독재, 인사 전횡 등을 추구하며 맹신적으로 목사를 따르게 하는 새로운 형태의 이단을 만들어 내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초대형 교회와 소위 귀족목사들의 학력 위조, 논문 표절, 공금 횡령 등의 비리로 시끌벅적하다. 미국에서는 조그마한 이민교회에서 좀 다른 형태의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인본주의란 광범위한 의미를 갖고 있지만 여기서 그런걸 논거하고 싶지는 않다. 교회에서 인본주의와 세속주의가 팽배하게 되면 목사가 여신도와 간음하지 않았거나 성도나 교회 돈을 (많이) 떼어먹지만 않았다면 영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어도 괜찮다는 식이 되어버린다. 그런 목사들은 신의가 없고 약속 깨기를 식은 죽 먹듯 한다. 또한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WWJD(What Would Jesus Do?)라는 관점 보다는 사람(목사)의 관점으로 설명하게 된다. 그러기에 교회가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목사가 산기도나 금식기도를 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왜 그런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까?’ 또는 ‘나도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가 아닙니다!’라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답변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언행심사이기에, 하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을 동원해서 파당을 지어서 어려운 일을 해결하려고 드는 정말로 믿어지지 않는 일도 벌어진다. 그러다 보니 은혜의 설교보다는 계속되는 정죄의 설교로 강대상의 신성함이 깨어지고 오염되는 불상사도 벌어진다. 이런 현상은 인격적으로 영글지 않고, 영적인 체험을 동반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신학자가 되었고 목사가 된,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돈을 벌기 위해서 목사가 된 경우에 나타난다 – Richard Baxter의 현대인을 위한 참된 목자(The Reformed Pastor) p18 하단, p73 상단 참조, 그리고 한국 어느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참가자 90%가 십일조가 폐지된다면 목회를 포기하겠다고 답했다 한다. 이렇게 세속적이 된 교회는 성령님이 내주 하시는 성도들이 바로 성전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성전의 의미를 건물로 치중하게 된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과중한 재정적인 부담을 안기면서 교회 건물 건축이나 구입에 매진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런데 교회 건축 또는 구입의 이유가 보다 확대되고 개선된 영적 사역이기보다는, 지역에서 교회위상이 우뚝 서서 연합행사들을 주최하는 것을 먼저 꼽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에 빠지게 된다. 목사가 세속적이 되면 교인들이 힘들게 일하여 따로 떼어 바치는 헌금의 많은 부분이 목사 사례비로 지출되는데도 불구하고 고마운 마음이 없고 기회만 있으면 적다고 불평한다. 또한 목양(牧羊)보다는 목회(牧會)에 치중하게 된다. 이 두 단어는 거의 동의어 같이 쓰이지만 목회는 행정을 포함한 교회의 모든 치리를 광범위하게 말하며, 목양은 글자 그대로 양을 치는 일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목회에 치중하는 목사는 교회행정에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간섭하기 원한다. 그러다 보니 유아세례 신청한 아이 이름은 기억 못하고. 기도 부탁한 일은 잊어먹고, 쪼잔하게 부흥강사에게 주는 물은 Fiji Water로 하라는 등 시시한 일에 신경을 많이 쓴다. 그런 시시한 일로 체면을 세우려다 보니 교회이름을 붙인 차를 타는 것을 창피하게 여긴다. 반면에 목양에 치중하는 목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귀중하게 여겨 상처받은 성도를 위하여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며 오로지 은혜의 설교로 양들을 먹이기 원한다.

영어에 ‘Kool Aid Drinker’라는 표현이 있는데 지도자를 맹종(盲從)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 말의 유래는 1970년대 말에 남미 가이아나(Guyana)에 있었던 Peoples Temple of the Disciples of Christ라는 이단사교 집단농장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미국 의회가 조사를 시작하자 교주 Jim Jones의 명령을 받고 천 여명의 맹신자들이 청산가리를 탄 Kool Aid를 마시고 죽은 사건이다. 평신도 지도자들의 고민은 어떻게 세속적인 목사에게 영적 각성을 촉구하고, Kool Aid Drinker들을 어떻게 일깨울 것인가 하는 것이다.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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