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누가복음 10장 25절부터 37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는 4복음서 중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있다. 이 비유는 성경에 나온 이야기를 주제로 구역별 연극발표 등을 할 때 탕자의 비유와 함께 가장 많이 인용되는 부분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잘 아는 내용이지만 다시 한절 한절 읽으며 묵상하는 가운데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25절에 보니 어느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율법교사란 율법사라고도 기록되어 있으며 율법의 해석과 적용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자들로 당시 유대사회에서 지도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신약시대에는 율법을 기록하거나 공표할 때 서기관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해서 율법교사와 서기관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율법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10계명을 비롯해서 율법서라고도 불리는 모세5경에 주로 기록되어있는 제사법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지켜야 할 계명으로 세상의 법과 구분된 하나님의 법을 가리킨다. 유대교 전승에 의하면 총 613개의 율법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율법이 있으니 이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필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여하간 이 율법교사들은 바리새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시험하고 예수님의 사역을 훼방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들은 율법의 준수를 유대인들에게 강요하였으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근엄하고 경건하게 행동하였다. 그러한 율법교사들을 예수님께서는 많이 책망하셨는데 우선 눅 11:46을 보면 율법교사들은 모세율법 이외에도 지키기 불가능한 수없이 많은 구전의 율법들을 만들어 내어 백성들에게 지키기를 강요하였지만 정작 자신들은 지키려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았음을 책망하셨다. 눅 11:52 – 여기서 말하는 지식의 열쇠란, 일반적인 지식에 대한 것보다는, 어떻게 구원과 영생을 얻는가 하는데 대한 해답에 이르는 열쇠로, 그러한 참 진리는 알지도 못하였으니 가르칠 수도 없었지만, 심지어 율법조차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제대로 가르치지 않음으로 그러한 지식을 알기 원하는 사람들을 결과적으로 방해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다. 그들은 끝내 예수님을 고발하여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가장 열심으로 뛰어다녔던 자들이었다. 그러한 율법교사가 자신들은 율법대로 행함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특히 선행이 그 율법의 중요한 부분임을 강조하는, 유대인의 믿음에 근거한 질문을 한 것인데 이는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한 것이다. 약 2:26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비록 행함이 중요하지만, 행함 자체로는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롬 3:28에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 3:16에 오로지 주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이 율법교사에게 어떻게 답변하셨는지 궁금하다.

26절에서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율법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느냐 물으시니, 27절에 율법사는 신명기 6:5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한 레19:18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답변하였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그렇게 사는 것이 사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시기에 이를 행하라 답하신다. 다시 말해서 율법교사에게 네가 참 잘 아는구나, 그런데 왜 묻냐? 그렇게 살면 될 것 아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율법교사는 그렇다면 내 몸과 같이 사랑 할 내 이웃은 누구냐고 묻고 있다. 그런데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런 질문을 했다고 29절에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이 율법교사는 주변에 어려운 처지에 있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진정 내 몸같이 사랑하지 못한데 대한 어떤 죄책감을 갖고 있었으며 또 진정 남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래서 자신을 정당화 하려는 심리가 있었던 것 같다.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이 비유를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하신 질문을 나 자신에게 되 물어 본다. 내가 내 자신의 몸같이 사랑할 이웃은 과연 누구일까?

30절 –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나매 – 예루살렘은 해발 약 2,490 ft로 그 일대에서 해발 약 2,680 ft인 감람산 다음으로 높은 지대이다. 여리고는 요단강 서쪽 사해 북쪽에 위치한 성읍인데 수면보다 약 700 ft가 아래인 지역이기에 성경에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갈 때 내려간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여리고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지휘로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한 첫 관문으로 우리에게는 잘 알려진 곳이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키 작은 세리장 삭개오가 올라갔던 뽕나무가 지금도 있고 엘리사가 쓴 물을 고쳤던 샘이 있는 곳이다.

예루살렘 - 여리고 지도

예루살렘 성 동편에 있는 양문으로 나와서 언덕길을 내려와 기드론 골짜기를 지나 감람산을 북쪽으로 돌아 동쪽으로 계속 가면 여리고가 있는데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15 mile 정도 거리로 걸어서 하룻길이었다. 101번으로 Westlake Blvd에서 Valley Circle정도까지의 거리에 해당한다. 당시에 감람산 기슭을 돌아 가는 길이 험해서 강도들이 자주 출몰하였다 한다. 그런데 강도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때리고 빼앗고 죽으라고 내버려두고 하는 짓이 비슷한 것 같다.

31절 –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 당시에는 제사장 만이 지성소에 들어 가서 하나님께 제사드릴 수 있는 거룩하고 구별된 사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규례를 가르치고 백성들의 송사를 재판하는 등의 책임을 갖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재판의 책임을 제외하면 목사에 해당된다. 강도 만난 사람을 가장 먼저 도와야 할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마 부흥회 인도하러 가는 길이라서 바빴는지 아니면 어디 저녁 초대를 받아서 가는 길이었는지 그냥 모르는 척 지나가 버린 것이다. 어두워서 못 보고 지나간 것이 아니고 보고도 못 본 척 의식적으로 피하여 간 것이라고 되어있다. 입으로는 매일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실제로는 하는 척도 하지 않은 그런 경우이다.

32절 –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 레위 인은 또 어떤 사람인가? 레위지파는 제사장을 비롯해서 24반열로 나뉘어서 성전에서 필요한 모든 일에 봉사하는 지파였다. 출애굽 후 광야 생활 때에는 성막을 세우고 거두고 옮기는 제반 업무를 수행했고, 언약궤를 메었고, 성전 건축과 보수를 지휘 감독했고,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의 준비를 맡았던 사람들이다. 이런 성전에서의 책무에 충실하도록 레위지파는 영토분배에서 제외되어 농사나 목축에 시간을 쏟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생계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린 십일조로 유지되었으며, 레위 인들은 이에 대한 십일조를 바쳤다. 이들은 지금으로 치면 전도사 등 유급 사역자에 해당된다. 사례비는 받지 않아도 예배의 순서를 맡는 찬양팀, 성가대, 장로 안수집사 권사들도 해당된다. 레위지파에서 가장 거룩한 직분인 제사장도 보고 그냥 모르는 척 했는데 일반 레위인이 피해간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나온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이 바로 현대 기독교인 특히 목사 장로들이 욕 먹는 대표적인 이유이다. ‘Practice what you preach’라는 격언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33절 –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 사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32 mile정도 떨어져 있는 성읍으로 북 이스라엘 6대 왕인 오므리가 주전 879년에 건설하여 수도로 삼았던 도시이다. 주전 722년에 앗수르의 침략으로 멸망하였고 앗수르 통치하에 있을 때 앗수르의 혼혈정책으로 잡혼이 이루어져 사마리아에 살던 유대인들은 혈통의 순수성을 상실하고 신앙 역시 변질되었다. 게다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남유다 사람들의 성전건축을 노골적으로 훼방하여 유다 백성들이 경멸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한 배경으로 사실 사마리아 인들은 회당에도 마음 놓고 나가지 못했었다. 그러니 이 사마리아 인은 요새로 치면 교회의 장로나 안수집사 무슨 부장 회장 이런 사람이 아니다. 뿌리는 교회에 있었지만 무슨 이유로 교회로부터 백안시 당하고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교인들끼리 모여서 이러 쿵 저러 쿵 하는데 끼지도 못하고, 거룩한 모습도 지어 보이지 않는, 때로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우습게 여기는 그런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람이 이 강도 맞은 자를 불쌍히 여긴 것이다.

34절 –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 당시에 민간요법으로 진한 올리브 기름(지금으로 치면 extra virgin olive oil)과 포도주를 섞어서 연고같이 만들어 외상에 발랐다 한다. 그런데 분문에 보니까 발라준 정도가 아니고 아주 부었다고 되어 있다. 당시에 기름과 포도주가 싸지는 않았을 터인데 강도 맞은 자를 위해서, 여행 중에 쓰려고 갖고 가던 것인지 아니면 장사하기 위한 물품이었는지, 아끼지 않고 쓰는 모습이다. 그리고는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갔다고 되어 있다. 지금으로 치면 타고 가던 자가용에 태워서 모신 것이다.

36절 –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 당시 한 데나리온은 하루치 임금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틀 분에 해당되는 돈을 미리 내어 주었다. 그리고 모자라면 돌아오는 길에 갚으리라고 약속한다. 아마도 여행을 자주해서 그 주막집 주인과는 아는 사이인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이 강도 맞은 자를 위해서 세심한 배려를 하는 모습이다.

여기까지가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말씀하신 비유이다. 그런데 당시로는 혁명적인 가르침으로 율법교사와 바리새인에게 끊임없는 도전을 받으셨던 주님께서 주신 이 비유는 얼핏 지나치면 너무나 단순하고 도덕시간에나 들을 것 같은 판에 박은듯한 말씀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비유의 끝에 이 세 사람 중에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누구냐고 물으신다. 율법사가 자비를 베푼 자라고 답하니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이르신다.

이 비유를 읽고 들을 때 마다, 이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에 젖어있는 우리들은,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해 주님이 답변하시는 과정에서 초점을 넌지시 바꾸신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율법교사는 우리가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런데 주님의 비유에는 강도 만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 이렇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여러 종류의 이웃을 제시하지 않으신 것이다. 오히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한 명이 등장하고 도와줄 수 있었던 사람이 세 사람 등장한다. 그리고 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이 셋 중에 누구냐고 물으셨다. 다시 말해서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할 나의 이웃은 내가 자비를 베풀어야 할 누군가가 아니라 나에게 자비를 베푼 자인 것이다. 강도 맞고 얻어맞아 거의 죽게 된 사람이 바로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영원히 죽을 우리들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길은 제사장이나 레위 인을 통해서 배운 율법이 아니다. 오로지 주님 한 분인데 주님께서는 거기서 우리들을 구원하여 주시었고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까지도 하신 것이다. 율법교사가 기대했던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은 너의 이웃이 아니라는 답도 하지 않으셨다. 네 몸과 같이 사랑 할 네 이웃은 바로 자비를 베푼 자라는 답이 나오도록 비유를 들으신 것이다. 그래서 자비를 베푼 선한 사마리아 인은, 당시 유대인이 배척했던 그 사마리아 인은 바로 예수님이라고 이해하면 이 비유의 새로운 해석에 우리는 한 발짝 들어 서 있게 된다. 주님께서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한 정답으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과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 둘 다 주셨는데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그것도 육신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버리고 말아왔었다. 그런데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할 이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실 육신의 이웃을 어떻게 내 몸과 꼭 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37절에서 가서 너도 사마리아인과 같이 하라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으시고 있다. 혹자는 우리가 볼 수 있는 이웃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서 선행을 베푼 사마리아 인 즉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비로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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