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로 드는 것이 예수님께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직접 내려 오셨다는 사실이다. 다른 종교들은 믿는 자들이 득도(得道)하여 어떤 경지에 이르는 것이지만 기독교는 주님을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오르기 힘든 험하고 높은 산 정상 어디에 구원의 비밀이 있는데, 기독교는 예수님이 그 비밀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것이고, 타 종교는 믿는 사람들이 갖은 고행과 수도를 통하여 산 정상에 올라가서 정상 어디엔가 숨겨져 있는 비밀을 찾아야 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기독교는 행함보다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이를 믿는 그 마음 자체를 중요시 여긴다. 기독교는 사람이 아무리 선한 일을 행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에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 2:26)이라는 통렬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었다. 여기서 행함이란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으로 값없이 구원 받은 사람으로써 당연히 있어야 할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표시를, 또한 그 사랑을 이웃들과 나누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인의 행함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고 구원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개신교 이외의 종교에서는 이 행함이 바로 득도의 경지로 연결되기에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 행함이라는 것이 선행이나 종교의식적인 것을 떠나서 종종 극기훈련이나 자학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삼보일배, 삼천배, 몸을 날카로운 송곳 같은 것으로 찌르는 짓, 그리고 고난주간이 되면 심심치 않게 보도되는 십자가에 직접 못 박히는 짓 등등. 이러한 일들에 대한 반작용이었는지, 30여년전만 해도 한국 개신교에서는 행함을 강조하지 않았었던 기억이다. 그에 비해 미국과 캐나다의 개신교에서는 일찍부터 선교라는 행함에 대한 정열이 있었다. 그 열매가 바로 한국에서 맺힌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여하간 한국 개신교는 오로지 믿음이었고 혹간 행함을 이야기하는 목사가 있으면 마치 이단을 대하듯 했었다. 그러나 교회가 비대해지면서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부작용들이 표면화 되면서 믿는 사람들도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는 손가락질을 받게 되며 상황이 바뀌었다. 비로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지녀야 할 행함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부작용은 생겼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마 6:3) 은밀히 행하라는 주님의 가르침(마 6:4, 본문에서는 구제를 다루었지만 모든 행함에 적용해야 한다고 믿는다)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행함을 여러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풍조가 되 살아난 것이다. 그 중에도 기도와 금식에 대한 외식적인 모습이 되 살아나는 것을 주목하여야 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셨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돌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전문 마 6:9-13, 부분 눅 11:2-4)를 가르치시기 전에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회당이나 큰 거리 어귀에 서서 하는(마 6:5) 외식적인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기도하라고 이르신다(마 6:6). 기도는 믿는 사람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대화하기 위하여 당연히 하여야 하는 일, 그리고 하나님 중심의 거룩한 행동이 되어야 하지만, 여기에도 자기 중심적인 행함과 습관이라는 함정이 있다. 그래서 은근히 자기는 기도를 엄청 많이 한다고 티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개는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그런데 거기에는, 평가하는 자가 평가 받는 자보다 의례 더 고수이기 때문에, 아무개 보다 자기가 기도를 더 많이 한다는 의미가 은연중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은, 그래서 자기로부터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지 못하면 기도하지 않는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기도만큼 개인적이고 은밀한 일을 넘보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보니 결국에 가서는 회당(교회)에 나와서 해야만 기도하는 사람이 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금식은 또한 어떠한가? 금식은 경건한 믿음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참회하는 의식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죄일에 스스로 괴롭게(레 16:29)하라는 규례를 받았는데 이는 금식하며 기도하고 자신의 심령을 살펴 하나님께 지은 죄를 참회하라는 뜻이다. 성경에 기록된 대표적인 금식의 예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서 모여서 영적 대 각성과 함께했던 참회의 금식(삼상 7:6)을 들 수 있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불륜을 숨기기 위해서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장에서 죽도록 획책하였기에 하나님의 노를 사서 밧세바에게서 얻은 아들이 심히 아프게 되었을 때 아들의 목숨을 구하며 금식하였다(삼하 12:16). 하나님께 무엇을 간절히 구할 때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을 때, 요새 하는 약식이 아니고 식음을 전폐하는 금식을 40일간 하였다(출 34:28). 성직을 수행할 때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전념한다는 뜻이다. 이 외에도 수 많은 금식의 예가 있지만 공통점은 모두가 하나님께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금식을 알리기 위해서 티를 내기 시작했다. 제대로 금식도 하지 않으며 꾀죄죄하고 피곤한 모습을 일부러 사람들에게 보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금식할 때 오히려 더 깨끗하게 하고 있으라고 이르셨다(마 6:16-18). 이렇게 티 내지 않는 것은 금식 후에도 적용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 식사할 기회가 있을 때 아직은 죽을 먹어야 한다는 식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몇 일 금식 운운 하는 것도 유아적인 것이다. 이는 금식한 날짜보다는 금식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님이나 모세의 금식을 흉내 내어 40일 운운 하는 것은 바벨탑을 쌓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기독교인의 행함이란 하나님의 분부를 지키는 것이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행동으로 옮겼다는 점을 꼽고 있다(약 2:21). 이제 성령님의 역사와 감화 가운데 사는 현대의 크리스천들은 믿는 것을, 말씀을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 실천에 옮기는 것, 즉 ‘Practice what you preach’의 개념으로 행하여야 하겠다. 예를 들어 동성결혼 합법화를 신앙인의 양심으로 반대하였는데 그런 법안을 지지한 대통령 후보자가 공짜로 뭘 많이 준다니까 그를 찍어주는 일은 표리부동하고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대로 자기도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요일 2:6). 인간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모두 따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크리스천으로써 그런 개념조차도 노력도 없다면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다.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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