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의 엉뚱한 질문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그 보다 더 큰 사람이 없다고(마 11:11) 칭찬하시었다. 또한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마 11:13)라고 말씀하심으로 세례 요한은 구약시대와 예수님 시대를 연결하는 마지막 선지자임을 암시하셨다. 세례 요한은 어떠했나?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않을 것(눅 1:15)이라는 천사 가브리엘(눅 1:19)의 예언으로 미루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나실인(민 6:3-4)으로 태어났음이 틀림없다. 예수님보다 6개월(눅 1:26, 36) 정도 먼저 태어난 세례 요한은 사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빈 들(눅 1:80)에서 청빈하게 살았다(마 3:4). 디베료 황제 통치 15년(눅 3:1)에 빈들에 있던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눅 3:2) 그는 요단 강 부근으로 나아와 회개의 세례를 베풀기 시작하였다(눅 3:3). 그러한 요한을 백성들이 그리스도인가 생각하자(눅 3:15)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장차 오실 이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고 자신은 그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증거하였다(눅 3:16). 비록 예수께 세례를 베풀기는 했지만(마 3:13-16, 막1:9, 눅 3:21, 요 1:31), 세례 후에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에게 내려오고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선포를(마 3:16-17, 막 1:10-11, 눅 3:22, 요 1:32-34) 직접 보고 들은 요한이기에, 자신은 결코 그리스도가 아니고 예수님 이야말로 하나님의 어린 양 메시아라고 증거하였다(요 1:29, 35-36).

그런 세례 요한이 엉뚱한 질문을 한 것이다. 때에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의 분봉왕(分封王: 왕이나 황제의 허락으로 일정 지역을 다스리던 군주) 헤롯 안디바가 자기 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것을 꾸짖은 죄로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혔 있었다(마 14:3-4, 막 6:17-18). 그 사이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기사이적을 행하셨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이런 소식을 그에게 알렸더니(마 11:2, 눅 7:18) 그는 두 제자를 예수께 보내어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이냐고 묻게 한 것이다(마 11:3, 눅 7:19-20). 이 부분을 혹자는 세례 요한이 의심이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그래서 직접 들어 보라고 보낸 것이라고 해석한다. 또 어떤 성경학자는 사형을 예감한 세례 요한이 일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적인 왕, 즉 로마를 뒤집어 엎고 자신을 옥에서 구해주기를 바라며 확인 차 제자를 보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필자는 세례 요한이 순간적으로 의심이 들어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둘기 같은 성령이 예수님께 내려오고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소리를 직접 들은 세례 요한도 이러했는데 우리는 어떠할까? 의심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면 전혀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고, 우리의 믿음이 진실된 것인지 다짐하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겠다.

묵상 중 여기서 더 중요하게 생각된 것은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었다. 내가 바로 메시아라고 답하지 않으시고,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이렇게 듣고 본 대로 전하라고 하신 것이다(마 11:4-5, 눅 7:22). 이는 이사야 35장 5절과 6절 및 61장 1절에 기록된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암시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보복(사 35:4) 및 포로된 자의 자유와 갇힌 자의 풀려남(사 61:1)을 언급하지 않으신 것에 주목하여야 한다. 혹시라도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서 친히 옥을 부수고 그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주지 않기 위해서 였을까? 더 눈을 끈 것은 복음의 전파를 가장 마지막에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이 순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순서대로 우리가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상사람들의 필요함을 먼저 채워 주셨다. 육신의 회복을 주시고 영적회복을 주신 것이다. 여기서 360도 선교의 실마리가 풀린다.

말씀과 행함(여기서는 기독교 관습적인 행함 보다는 긍휼사역을 뜻한다)은 그 균형이 맞아야 한다. 말씀만 붙들고 있으면 절름발이가 된다. 미국 교회역사가인 George Marsden은 그의 저서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에서 복음주의(Evangelicalism)에 입각한 미국의 개신교 교회들이 긍휼사역에 앞장서 왔었는데 1900년대 초부터 대 반전(Great Reversal)이 일어나 교회들이 이런 사역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주지하였다. 이런 현상은 말씀만 붙들고 있는 그리고 현실 참여를 외면하고 있는 모습으로 까지 나타난다. 세례 요한의 질문으로 시작한 묵상이 교회가 감당하여야 하는 일들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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