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델의 메시아

중학생 때 이었다. 임원들과 같이 주보를 긁고 (주: 등사지를 ‘가리방’에 대고 철필로 쓰는 것), 촛불에 숟가락을 데워서 등사기에 등사지를 녹여 붙이고, 밀어서 (주: 등사해서) 다 접어놓았다. 부장 선생님이 사다 주신 군밤을 먹으며 중등부 사무실을 나오는데 이층 대 예배실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웅장한 합창 소리가 들려 왔다. 모두가 서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참 오늘 우리 교회에서 연합으로 메시아 연습하는 날이구나. 우리 올라가서 들어보자.” 삼층 발코니에 올라갔을 때, 그 장엄하고 경건한 화음에 온 몸이 자지러드는 것만 같았다. 압도해오는 감격에 가슴이 뻐근해 있는데 선생님이 귀엣말을 하셨다. “저게 유명한 헨델의 할렐루야란다.”

헨델은 53곡으로 구성된 오라토리오 (주: 오페라가 무대장치, 분장, 의상, 연기 및 음악의 종합인데 반하여, 오라토리오는 독창, 중창 및 합창과 관현악의 음악 위주임. 오라토리오는 대규모로 연주회용이고, 칸타타는 소규모로 종교예식 용임.) 메시아를 21일이라는 경이적으로 짧은 기간에 작곡하였다 (주: 작곡기간에 대해서는 21일에서 24일까지 다양하다). 성령님의 역사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메시아의 가사는 그 전부가 성경에서 인용된 것으로, 그의 친구 시인 Charles Jennens가 쓴 기도서에 근거하고 있다. 헨델은 그 때까지 많은 종교음악을 작곡했지만, 교회음악가로 알려져 있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메시아라는, 그의 다른 음악들과는 상당히 스타일이 다른 음악 하나로, 그는 교회/종교음악가로 잘못(?) 알려지게 되었다. 메시아는 많은 영광스러운 합창곡들로 유명하다. 기록에 의하면 건강도 좋지 않은 헨델이 식음을 전폐하고 할렐루야 작곡을 마친 후, 눈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보았다고 간증하였다고 한다. 또한 메시아 영국 공연 시 할렐루야 합창 중 그 영광스러움에 감동한 영국 왕 죠지 2세가 기립하였던 것을 연유로 (주: 이에 대한 사실유무 또한 여러 설이 있다.) 할렐루야 연주 시 모든 청중이 기립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다.

이제 생각해 보면, 그 때 들었던 “할렐루야”가 나의 깊은 곳에 남아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찬양에 대한 정의가 서서히 이루어진 것 같다. 특히 주일 대 예배 때 드리는 특별찬양의 성격에 대한 생각은, 복음성가를 즐겨 듣고 부르지만, 굉장히 완고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오해마시길 – 할렐루야 같은 곡을 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사실 성탄절만 되면 이 교회 저 교회에서 경쟁하듯 신문에 대문짝만큼 광고해가며 오케스트라와 솔로이스트들을 사와서 (너무 강한 표현인가?) 메시아 연주하는 것에 대해 몹시 회의적이다. 아니 메시아 연주에 대해 회의적인 것이 아니고 연주하는 자들의 ‘이 정도는 해야지’하며 으스대는 모습이 마구간에 오신 주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니까. 어느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를 구하는데 메시아를 지휘한 경험이 우선 조건이라는 웃지 못 할 일도 보았다. 여하간, 찬양의 제물은 온통 주님께 영광 돌리는 경건함으로, 때로는 주님의 고난을 상고하며 멍클 하고 장엄하게, 때로는 주님과 만남의 축제로 환희의 찬양을 바쳐야 할 것이다. 일전에 아틀란타에서 있었던 찬양 리더 세미나에 참석하여 교회음악의 양분화가 심각하여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복음성가만이 찬양이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공공연하게 “왜 교회에 성가대가 필요하냐?”고 질문하는데 우선 아연실색했고, 또 그 편에 일방적으로 서서 그들을 두둔하는 소위 현대교회음악의 지도자들을 볼 때 문제의 심각성을 느꼈다. 거꾸로 복음성가를 마치 무슨 불량가요정도로 취급하는 그런 사람들도 문제이다.

찬양에서도 십자가의 진리를 찾으면 이런 갈등은 해소되리라. 주님께 영광 돌리는 수직적인 찬양과 주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역사 안에서 우리의 감성이 교감 되는 수평적인 복음성가가 균형 있게 드려져서 십자가의 모습이 이루어져야 하겠다.

한가지 집고 가고 싶은 것은 찬양을 음악적으로 잘해서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생각하는 성가대 지휘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신의 행함을 통해서, 자신이 의로워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찬양은 언제나 드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군천사들의 찬양을 항상 들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찬양을 들어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2008년 7월)

p.s. 이제는 세월도 많이 지나, 현대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은 크기에 관계없이, 성가대가 실제로 없어지는 추세이다.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현대적인 예배의 분위기를 살펴본다. 미국교회의 경우 담임목사가 청바지에 남방 차림으로 설교하는 모습을 흔히 본다. 기타와 드럼 키보드를 동원하여 박수를 치며 열정적으로 복음성가를 부른 끝에 가운을 입고 성가대가 서는 것은 너무나 급격한 분위기 전환으로 흐름이 어색하다. 찬양, 기도, 봉헌, 말씀이라는 예배의 4가지 핵심에 초점을 맞추는 핵심예배가 이제는 추세이다. 여기서 찬양은 성가대가 부르는 찬양을 듣는 그런 순서가 아니고 예배자들 모두가 목소리를 합쳐서 부르는 찬양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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