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력을 보이며 인내한다고 뽐내는 사람을 보았다. 말의 깊은 뜻을 모르고 나대는 어린 아이를 보는 느낌이다. 체력은 특정한 인내의 한 요소는 될지언정 인내 자체와는 구별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마라톤의 경우 심폐기능의 강건한 체력이 장시간의 뜀을 견디는 지구력과 인내의 기초가 된다. 100 Kg짜리 역도를 오래 들고 있기 위해서는 당연히 체력이 바쳐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인내라 표현하지 않고 힘이 좋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인내’하면 정신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인내’라는 단어는 힘 력(力)자 보다는 마음 심(心)자와 함께 더 많이 쓰이는 것이다. 인내와 체력의 관계는 전혀 설정할 수가 없다. 체력이 강한 사람이 꼭 인내심이 강한 것도 아니고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 꼭 체력이 강한 것이 아니다. 인도의 수도자들을 보면 체력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빨래판 같이 갈비가 튀어나온 깡 마른 몸으로 벼라 별 기괴한 몸짓으로, 때로는 몸에 상처를 내는 자학의 형태로, 인내를 뽐내는 것을 종종 본다. 정신에 근원을 둔 힘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인내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우선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사람들의 인내와 기다림을 구별하여야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고 은혜가 많으시기 때문에 인간들이 죄를 지어도 참으시며(출 34:6, 민 14:18), 인간들의 회개(롬 2:4))와 구원(벧후 3:15)을 위해서 참으시고, 궁극적으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롬 15:5-6) 인내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기 때문에 이렇게 오래 참으시는 속성이 어떤 노력이나 훈련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바라며 기다리는 것은 성령의 열매(갈 5:22)이니 체력으로 힘을 써서 인내하는 것이 아니다. 환난을 인내로 이기는 것은 주신 약속(눅 21:15-19)을 믿는 마음으로 가능하며 그 결과로 영혼을 얻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성경에는 인내에 관한 많은 구절들이 나오지만 그 모두가 인내력이 아니고 인내심인 것을 주목하여야 한다.
인내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 (Patience is bitter but its fruit is sweet.) – 인내에 관한 명언 중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것이다. (주: 이 말을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다는 것은 완전히 잘못 된 것이고, 루소가 했다는 것은 반 정답. 원래는 불란서의 여행가 샤딘{Jean Chardin}의 페르시아와 근동에 관한 책에 등장한 문구인데 루소가 그의 철학에 인용함으로 유명해졌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들은 그 과정이 때로는 힘들어도 궁극적인 승리를 위하여 오직 성령님의 인도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인내하여야 하겠다.
(2016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