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디어지는 것

‘개구리 삶기 (Boiling Frog)’라는 이야기가 있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넣으면 깜짝 놀라서 뛰어나오지만 찬물에 넣고 아주 서서히 물 온도를 높여주면 물이 끓어도 편안하게 웃으며(?) 죽는다는 이야기이다. 천천히 변할 때 무디어져서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그저 비유나 속담처럼 생각하는 이야기인데 19세기에 온도까지 측정하며 실험을 했다는 기록을 보고 실소를 금할 길이 없다. 이 이야기를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적용해 본다. 어떤 환경이 아주 서서히 오랜 기간을 통하여 변할 때 우리는 그 변화의 심각성을 감지하지 못한다. 밖에서 보면 죽을 지경이 된 것 같은데 그 안에서는 알아 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남북긴장을 보면 과거 수십년 동안 서서히 달아올라 이제는 무슨 일이 당장 터질 것 같은데 막상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미국에서는 연일 외신 톱으로 나오는데 말이다. 지진대에 있는 캘리포니아는 우리가 미국에 온 40여년 전부터 지금까지 곧 대지진이 올 것이라는 경고 속에서 살고 있다. 동부에 사시는 삼촌께서는 그 때부터 이사 오라고 하신다. 조그마한 지진 소식이 있어도 한국에 계신 친척들이 전화해서 안부를 묻는다. 지진이 있었음을 전화 받고서야 아는 때도 있었다. 당면한 문제를 무심히 지나가는 현상에 대한 설명은 한국이나 이곳 캘리포니아나 같다 – 걱정해봐야 소용없지. 나는 내가 이렇게 무디어지는 것이 싫다.

이런 현상은 잘못된 상황이 시정되지 않고 계속될 때에도 나타난다. 정기적으로 모이는 어느 모임의 프로그램에 항상 오타나 오류가 있어 처음에는 시정을 요청했지만 전혀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포기하기로 하였다. 아니 그냥 안 보고 무시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러니 프로그램의 가치가 인쇄된 종이 값보다 못한 상황이 되었다. 오타는 뜻을 헤아릴 수가 있지만 오류는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 특히 공지사항에 오류가 많다면 문제이다. 어쨌던 나는 내가 이렇게 무디어지는 것이 싫다.

목사가 목사를 명예훼손으로 목사를 증인으로 세워 고액의 배상금을 청구한 소송 이야기를 듣고 잠시 그 사건을 재판할 법정을 상상해 보았다. 목사 세명이 모여서 서로 이 말 저 말을 했느니 안 했는니 하고 따질 터인데 참으로 창피한 장면이 연출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소송을 제기한 목사는 그런 소송을 제기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명예훼손이었는지 모르지만, 더 창피한 일이 벌어지고 망신살이 뻗칠 것이 불 보듯 한데 그걸 모르는 것이 한심하다. 그런데 왜 이런 사건을 보고도 목사들의 영적 타락에 대한 통탄함이 내게는 없을까? 왜 나는 목사들의 영적 우위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고 있는 것일까? 나는 내가 이렇게 무디어지는 것이 싫다.

이렇게 이일 저일 무디어 지다가 언젠가는 아주 서서히 더워지는 물속의 개구리같이 되지는 않을까?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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