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영지주의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물의 깊이는 잴 수도 있고 확인할 수가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볼 수도 없고 잴 수도 없으니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경은 볼 수 있는 일을 먼저 성실하게 행하라는 가르침을 하고 있다. 이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눅 16:1-9)에 이어서 나오는 10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난해 비유 중 하나인데 자칫 잘못 해석하면 주인의 재물을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제 멋대로 쓴 청지기를 칭찬하는 것 같이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된 것은 자신을 위해서 이 세상 사람들은 수단방법을 다하여 최선을 하고 있는데, 빛의 아들들(눅 16:8, 믿음의 사람들)도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대비해서 역시 최선을 하여야 하겠다는 것이다. 10절에 언급된 지극히 작은 것은 이 땅의 일이고 지극히 큰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이다. 볼 수 있는 이 땅의 일을 성실하게 또는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행하는 모습이 없을 때 하나님 나라의 일을 어떻게 충성스럽게 하겠냐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일 4:20)’라고 말하고 있다. 눈 앞에 물리적으로 존재하고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차원이 다른 경험을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요한일서 앞부분에서부터 사도 요한이 귀띔하고 있는 주제와 연결이 된다. 1:6 –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뒤집어서 말하면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하면 빛가운데 거하고 진실과 진리를 행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2:4 –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하는지, 하나님을 얼마나 아는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하나님과 깊은 영적교제를 하고 하나님을 많이 알고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런 줄로 아는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언행을 보면 그 말의 진실성을 가늠할 수가 있다.

사도요한은 초대교회를 혼란 시키고 있던 원시 영지주의와 거짓 선지자들을 논박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썼다. 영지주의는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영혼은 절대적으로 선하고 육체는 절대적으로 악하다는 논리이다. 후일 체계를 갖추고 여러가지 이론을 발전시켰지만 초기에는 특별한 영적지식(줄여서 영지)을 통하여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구원받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단적으로 육체를 통한 죄악은 당연하고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고 가르친 것이다. 이런 이원론적 주장은 결국 도덕적 타락을 낳았다. 사도 요한은 이런 이단 사상을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에 나온 사실(요일 4:1) 또한 경고하고 있다.

세상 일을 대충하는 사람을 본다. 여기서 세상 일이란 하늘나라가 아닌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즉 이 세상의 교회 안에서 하는 일까지도 포함한다. 사실은 교회 안의 일에 더 초점을 맞추고 싶고 평신도들과 교역자들을 함께 대상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교회에서 맡은 아주 작은 일에도 전력을 다하여 빈틈없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건성으로 반복되는 실수투성이로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특히 틈만 나면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이 후자의 모습을 보일 때 그 주여 주여의 진실성에 의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마 7:21)고 주님께서 직접 가르치신 말씀이 떠 오른다. 영적(靈的)인 사람이라고 자처하며 금식할 때 광고까지 하는데 노골적으로 식탐(食貪)하는 모습을 보면 그 금식의 진정성에 대해서 의문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다른 글에서 언급했던 목사를 고소한 어느 목사를 생각해 본다. 그도 틈만 나면 주여 주여 하겠지. 목사니까 교인들 앞에서 사랑 어쩌고 저쩌고 설교하겠지. 이렇게 배타적인 짓을 하는 경우, 사도 요한의 가르침대로, 볼 수 있는 쪽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고 볼 수 없는 쪽에 대한 주장은 거짓이다. 아니면 영지주의와 같이 영과 육을 따로 떼어 놓고 아무 거리낌 없이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일까?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이 속담은 사람을 중심으로 생긴 것이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심령을 감찰하시는(잠 16:2)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잊으면 안되겠다.

(2107년 5월)

2 Comments

  1. 영지주의는 위선의 극치? 위선은 거의 모든사람이…정도의 차이는 클수 있겟지만. 교인들도 다소의 위선이 있을수 있겟지만, 목사나 장노가 심한 위선을 행한다면? 교계내의 자정방법은 없을까요? 목회자도 한인간으로 인간의 상한가와 하한가사이에서 행동한다면 너무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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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독교인 또는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경계하고 자신을 성찰할 부분이 바로 이 위선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영어로는 ‘Practice what you preach’라는 격언이 있지요. 어떤 일을 하라고 가르치며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위선의 극치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상한선이나 하한선을 정해 놓는다는 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믿었기에 의롭다 함을 받은(이신칭의: 以信稱義) 우리들이기에 추락함을 경계하고 삶의 상한선을 끊임 없이 높이기 위해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삶이라면 하한선이란 있을 수가 없지요. 설혹 하한선이 있더라도 목사를 고소하는 것이 그 목사의 하한선보다 위에 있다면 과연 그 사람이 참된 목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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