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를 Love Story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목사를 보았다. 그리고는 당시 이스라엘은 보리를 추수할 때 매춘이 가장 활발하였다고 설명한다. 그런 상황에 룻이라는 젊은 과부가 나이 많은 보아스라는 남자의 이불 속으로 슬그머니 들어갔다고(룻 3:7) 하는 이런 쓸데없는 말로 시작한 설교는 아무리 본질을 알고 한다 해도 이미 삼천포로 빠져버려 돌이킬 길이 없다. 그러면서 룻기는 아주 쉬운 이야기이니 남들에게 이야기해 주기도 쉽다는 식의, 마치 삼류소설에 나오는 이야기 같은 취급을 설교 중에 하여 아주 불편했던 기억이다.
룻기는 사랑의 이야기가 맞다. 그러나 앞의 사람이 암시한 보아스와 룻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의 사랑 이야기이며 하나님의 나오미와 룻에 대한 자비와 사랑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먼저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 구약, 특히 룻기에 여러 번 등장하는 기업을 무른다는 것의 의미이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친족끼리 서로를 보호하고 어려운 삶을 살지 않도록 돌볼 의무가 있었다. 그런 의무에 자손 없이 죽은 형제가 있을 경우 그 아내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음으로 대를 잇게 하고(신 25:5-6), 경제적으로 어려워 땅을 팔았을 때 다시 사서 돌려주고(레 25:23-28), 억울하게 죽임 당한 친족의 원수를 갚는(신 19:11-13) 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제도를 통하여 각 지파에 분배된 땅(기업)을 보존하고, 혈통을 유지하며, 억울한 일이 생겼을 때 정당한 보상을 해주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주의를 기우려야 하는 부분이 예수의 족보이다. 예수의 족보는 마태복음(1:1-17)과 누가복음(3:23-38)에 소개되어 있는데 두 족보가 사뭇 달라서 고민스럽다 – 마태복음은 아브라함으로 시작해서 예수까지 내려가는 형식이고 누가복음은 거꾸로 예수로 시작하여 아담과 하나님까지 올라간다. 이런 형식의 차이 뿐만 아니라 족보에 등장하는 사람 이름과 숫자도 크게 다르니 이에 대한 많은 연구와 설명들이 있다. 여기서는 내리닫이로 이해하기 쉽고 5명의 여인이 등장하는 마태복음의 족보를 인용한다. 동정녀 마리아(마 1:16)를 제외한 4명의 여인 다말(마 1:3), 라합(마 1:5), 룻(마 1:5), 밧세바(마 1:6, 우리야의 아내) 모두가 이방 여인이며 떳떳치 못한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마태는 그런 여인들을 예수의 족보에 솔직하게 언급하여 하나님께서 들어 쓰신다면 신분을 막론하고 귀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과 예수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속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세리이기에 이방인보다 더 못한 취급을 받았던 마태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하단) 말씀하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감격스러웠던 것이 아닐까?
이쯤에서 룻의 이야기로 되 돌아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부관계는 어려운 관계의 대표적인 경우로 표현된다. 그러나 룻과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의 관계는 그렇지가 않았다. 흉년을 맞아 베들레헴에서 모압 지방으로 피난간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는 비극을 겪는다(룻 1:1-5). 그러던 중 유다 땅에 풍년이 들어 양식이 풍성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두 며느리가 따라 나선다(룻 1:6-7).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하지만 울며 따라오는 그들을 재차 권면하며 오르바는 눈물로 작별을 고하고 룻은 나오미를 따른다(룻 1:8-14). 이 과정에서 나오미는 기업을 무를 자가 직계(直系)로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한다(룻 1:11-12). 또한 룻은 나오미에게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1:16)라는 헌신의 고백을 하여 시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자신이 하나님에 속한자임을 천명한다. 베들레헴에 돌아온 나오미는 남편의 친족 중 보아스라는 사람이 있음을 룻에게 상기시킨다(룻 2:1). 당시의 풍습대로 룻은 추수하는 보아스의 밭에 가서 떨어진 이삭을 줍는데 이를 본 보아스가 특별한 배려를 한다(룻 2:2-10). 그 이유는 보아스가 이미 시어머니를 잘 모신 룻에 대한 소문을 들어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룻 2:11-13). 이렇게 보아스로부터 많은 은혜를 입던 중(룻 2:14-19) 나오미는 보아스가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임을 다시 한번 주지시키고(룻 2:20) 룻에게 단정하게 행실할 것을 당부한다(룻 2:21-23). 어느 날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에 누워있으라고 한다(룻 3:1-7). 룻이 시어머니의 말대로 행하니 이에 놀란 보아스에게 룻은 그가 기업 무를 자임을 말하는데(룻 3:8-9) 보아스는 룻의 시아버지 엘리멜렉의 친족 중 자기보다 촌수가 더 가까운 자가 있으니 그에게 우선 물어보겠다고 답한다(룻 3:10-13). 여기서 기업을 무를 자는 촌수가 가까운 사람에게 우선권은 있지만 이를 반드시 이행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보아스는 장로들을 청하고 그 기업 무를 자에게 나오미의 땅을 사서 기업을 무르겠냐고 물어보지만(룻 4:1-5) 그는 손해를 볼까 걱정하여 이를 공식적으로 사양한다(룻 4:6-8). 비로서 보아스는 장로들과 백성 앞에서 엘리멜렉의 기업을 자신이 무르게 됨을 공포하고 룻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룻 4:9-13).
여기서 분명한 것은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로써 그 책임을 공정하고 충실하게 행하였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사람이 은근히 암시했던 그런 일도 그 이불 속에서는 없었다. 기업을 무르는 일과 룻이 예수님의 족보에 당당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빼면 이 이야기는 간단하게 보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해 보이는 이야기에도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가 충만해 있음을 다시 한번 묵상해 본다.
(2017년 5월)
p.s. 교회의 소그룹 모임에서 룻기를 살펴보았는데 한 성도님이 하신 말을 나눕니다. 룻도 룻이지만 나오미가 참 괜찮은 시어머니라는 것이지요. 타지에 가서 며느리를 보았는데 그 후로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가 ‘사람 잡아먹는 너희들이 집안에 들어와서’라는 식의 말을 하지않은 것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르바도 처음에는 친정으로 돌아가기를 사양했고 룻은 끝까지 나오미를 따른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지요. 연속극에 나오는 독한 말 잘하는 옛날 시어머니들을 떠 올리며 모두가 고개를 끄떡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