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질은 담보로 잡혀 있는 사람을 뜻한다. 순수한 한글로는 볼모라는 단어도 있는데 그 뜻과 사용에 차이가 있다. 생명을 담보로 정치적 또는 금전적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폭력을 사용하여 사람을 납치하였을 때 인질이라 한다. 반면 볼모는 강대국(또는 중앙정부)이 약소국(또는 지방정부)의 변치 않는 충성을 보장받기 위하여, 본래의 신분에 따라 적절하게 대우하며, 정치적으로 모셔(?)간 사람을 뜻한다. 한국역사에 병자호란에 패한 조선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나라에 볼모로 보낸 일이 있었다.
인질을 붙들어 놓고 자신들의 요구를 내세우는 사태를 인질극이라 한다. 그런데 이 극(劇)자가 좀 의아스럽다. 연극의 ‘극’자로 익숙해 있어 한자사전을 찾아보니 심할 극이라 되어 있고 심하다, 번거롭다, 연극 등의 뜻으로 쓰인다고 되어있다. 여기서 ‘심하다’ 또는 ‘번거롭다’는 아닌 것 같고, 그러면 사람을 잡아 놓고 연극을 한다는 뜻인가?
8월 21일 문재인 한국 대통령이 미국 상하원 의원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미국의 대북 군사적 옵션 실행 가능성과 관련해서 ‘아주 제한적 범위의 군사적 옵션의 실행도 결국 남북간 군사 충돌로 이어질 것이며 이것은 한국인만 아니라 한국 내 외국인과 주한미군의 생명까지 위태롭게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는 보도를 듣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떠한 군사적 가상상황(scenario)을 고려할 때 여러 변수(變數, variables)사항들과 정수(定數, constants)사항들이 등장한다. 기본정의(high-level definition) 단계에서 이런 것들은 실제적인 숫자가 아니고 고려할 사항(item 또는 event)인가 아닌가로 구분된다. 예를 들자면 몇 년 전만해도 북한의 핵무기 사용은 전혀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변수사항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정수사항으로 도출되는 것이 인명과 재산피해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어떠한 군사적 충돌의 경우에도 꼭 고려해야 할 사항이 바로 인명과 재산피해에 대한 예상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극히 기본적인 사항을 일국의 대통령이 무슨 대단한 새로운 사실같이, 게다가 미국 의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미국국민들의 생명까지 거론하며 운운했다는 것이 참 놀랍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다.
한반도의 경우 인구 초 밀집지역인 서울이 군사분계선으로부터 35 mile (56 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특히 북한이 군사시설과 일반시설을 가리지 않고 공격할 때 그 피해는 가공할 만한 수준일 것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북한이 남한을 인질로 잡고 여러가지 공갈과 협박을 자행하고 있다고 분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국의 대통령이 스스로 인질임을 자처하고 오히려 그런 사실을 들어서 외국 의원대표단에게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하며 노골적으로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인질극은 인질범이 하는 것인데 거꾸로 인질이 인질극을 벌인 역(逆) 인질극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발언이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수석전략가(Chief Strategist) 스티브 배넌(Steve Bannon)이 파면된 지 불과 이틀 후에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티브 배넌이 계간지 American Prospect와 한 인터뷰 내용이 web site에 공개되었는데 한국과 직접 연관된 내용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때 30분 이내에 서울 인구 천만명이 사망하지 않는다는 방안이 있기 전에는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해법은 없다 (There’s no military solution, forget it. Until somebody solves the part of the equation that shows me that ten million people in Seoul don’t die in the first 30 minutes …)라는 부분이다. 이 기사는 미국 시간으로 8월 16일에 보도 되었고, 그는 이틀 후인 18일(한국시간 19일)에 파면 되었다. 이는 군사적인 모든 옵션을 고려하고 있다는 트럼프의 공언과 상반되는 말이며, 트럼프의 말은 전략적 허풍이라는 의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따라서 북한과의 협상에 상대적으로 우위를 지킬 수 없는 약점으로 재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돌출발언과 행동으로 주목받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은 이렇다 할 설명없이 그를 파면하였다. 한반도에서 군사적 충돌이 있을 경우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는 것은 기정 사실인데, 현 시국에 굳이 그런 말을 한 것이 트럼프의 비위를 거슬렸다고 많은 평론가들이 말하고 있다. 21일 미국 의원대표단을 만났을 때 문 대통령이 이러한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미국 의원대표들과 만날 때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특히 한국과 관계가 있는 일이라면 사소한 일이라도 파악하고 만나야 할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문 대통령의 이런 언행은 연일 강경발언을 쏟아낸 트럼프를 정면으로 한방 때린 꼴이다. 금년 3월 초 New York Times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도 노(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문 대통령이니 그런 연장선에서의 발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여하간, 문 대통령이 트럼프의 참모였다면 역시 짤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상상을 해 보면 앞으로 한미관계, 더 정확히 문재인 트럼프 두 대통령의 관계가 그렇게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비슷한 처지의 이스라엘을 생각해본다. 주변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을 세계지도에서 지워버리겠다는 공갈을 공공연히 하고 있다. 이스라엘 수상은 그런 이유를 들어서 이락 전을 반대하거나 미국의 전략에 영향을 미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락과의 전쟁 때 적극 개입하려는 이스라엘을 아랍 동맹국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해서 미국이 말리는 상황이 벌어졌었다. 이스라엘은 국방력을 강화하여 1967년 6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지속적으로 공격과 수비에 만전을 기하여, 팔레스타인의 테러공격은 가끔 있지만, 덩치도 크고 군인 수도 훨씬 더 많은 주변국들이 군사적으로 공연히 찝쩍거리는 일이 없어졌다. 막강한 정예공군을 초기공격의 주력으로 삼았고 미사일 및 로켓포에 대비한 대공방어용 무기체제인 Iron Dome, Iron Beam, Arrow 및 David’s Sling 등의 개발과 배치로 자국의 보호에 만전을 기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다. THADD 배치 하나 놓고 질질 매며 이를 반대하는 시민들에게 도로를 점령당해 헬기로 성주기지를 드나든다는 보도를 접하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내가 태어난 그 나라가 맞는지 의심이 든다.
911사태는 미국의 전략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어떠한 무력도발도 미국 본토나 영토에서 시작되거나 확산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된 것이다. 북한이 미국을 직접 건드릴 경우 미국의 군사작전으로 벌어지는 제 3국의 2차피해(collateral damage)는 정당화할 수 있는 손실(justifiable loss)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두 정상간에 긴밀한 관계와 소통이 없다면 그런 방정식에 미치는 영향도 남한에게 그렇게 좋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2017년 8월)
p.s. 이 글을 마지막 손질하여 올리고 났는데 북한에서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하여 일본 영공을 지나 태평양에 떨어졌다는 보도를 접하게 되었다. 영공에 대한 정확한 국제적인 협약이 없고 미사일이 약 550 Km 고공을 지나 엄격히 따지면 영공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주권국가의 국토 위를 대량살상 무기가 사전 허락 없이 통과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일본의 아베 총리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즉각 통화하고 양국의 대북정책이 완전히 일치한다고 발표한 사실이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과 통화한다는 보도는 없고 청와대도 트럼프와 통화할 계획이 없다고 발표했다는 것이다. 일본만이 당사국이란 말인가? 아니면 걱정한대로, 인질극을 인질과 인질범이 손발이 맞아 하는 모양세에, 트럼프의 눈에 문 대통령은 이미 짤린 대통령일까?
p.p.s Bloomberg에 난 Israel Has a Playbook for Dealing with North Korea라는 제목의 기사
김홍욱 글 모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