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구글(Google) 의대를 나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 친구 의사가 한 말이다. 병원에 오기 전에 구글로 증세를 찾아보고 자가진단은 물론 어떤 환자는 처방 받을 약까지 정하고 오는 경우도 꽤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많은 경우 선무당 사람 잡는다는 속담을 기억나게 한다는 것이다.
1517년에 시작된 종교개혁의 선봉장 마틴 루터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을 꼽는다. 이로써 성경은 더 이상 사제들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육체노동이 위주였던 당시의 바쁜 삶 중에 평신도들이 차분하게 앉아서 성경을 읽을 기회는, 더더구나 어려운 성경구절에 대한 해석을 구하기란 여전히 어려운 상태였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어떤가? 주석이 딸려 있는 성경이 많이 있어 평신도도 난해구절에 대한 설명을 즉석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조금 성의를 내면 구글을 통하여 더 자세하고 깊은 해설 및 논문을 비롯한 여러가지 정보를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선무당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출처의 정통성 확인 및 이단사설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 식별하여 취사선택하는 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특정 성경구절을 컴퓨터 성경을 통해서 얼마든지 쉽게 찾을 수 있고, 한 구절을 다른 번역판 및 언어로 비교할 수도 있다. 비로소 평신도들이 성경을 쉽게 읽을 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성경말씀에 대한 묵상 및 연구 자료를 아주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생각하는 2차 종교개혁이다.
목사들은 이런 현대를 사는 평신도들의 수준을 잘 이해하고 설교하여야 한다. 가장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냥 많은 성경구절을 나열하는 방식의 설교는 지양(止揚)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이 지양이라는 단어의 뜻을 짚어본다. 흔히 쓰는 경우는 어떤 것을 하지 않고 참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냥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더 높은 단계로 오르기 위하여 어떤 행위나 생각을 피하는 것을 뜻한다. ‘안하니만 못하다’라는 표현과 과유불급(過猶不及 –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이라는 고사성어를 생각하면 된다. 철학에서 지양은 변증법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으로, 반대되는 두 명제 즉 정(定)과 반(反)이 합(合)하여 졌을 때 그 두 명제 자체는 부정되지만, 오히려 한단계 더 높은 단계에서 그 내용이 보전되며 구체화된다는 것이다. 지양이라는 단어는 일반적 의미와 철학적 의미가 경우에 따라서는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이 든다.
마태복음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는 말씀으로 설교준비를 한다고 가정하자. 우선 개역개정판 인터넷 성경으로 ‘소금’을 찾아보면 모두 28개의 성경구절이 나온다. 여기까지는 아무나 다 할 수 있다. 한 발 더 나가면 그 구절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묵상할 수도 있다. 조금 더 노력하면 그 다양한 소금이라는 표현의 용례(用例)를 분류해 볼 수도 있다.
- 예수님께서 산상복음 중에 성도들에게 세상의 (부패를 막아야 하는) 소금이라고 말하신 구절 및 유사 구절 – 마 5:13, 막 9:50, 눅 14:34
- 소금이 언급되었지만 그 해석이 난해한 구절 (일반적으로 마지막 심판 때 정결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해석이 주류다) – 막 9:49
- 제물에 소금을 치라는 구절 – 레 2:13, 겔 43:24
- 불순종에 대한 심판 – 창 19:26
- 멸망의 상징과 완전한 파괴와 저주, 불모지 – 겔 47:11, 삿 9:45, 욥 39:6, 습 2:9, 신 29:23
- 소금에 연유한 지명 – 수 15:62, 대상 18:12, 대하 25:11, 삼하 8:13, 왕하 14:7
- 음식의 간을 맞추는 것 – 욥 6:6
- 변하지 않는 언약 – 대하 13:5, 민 18:19
- 치유하는 것 – 왕하 2:20-21
- 성결 또는 정결하게 하는 것 – 출 30:35, 겔 16:4
- 왕이 내려주는 귀한 것 – 스 4:14, 스 6:9, 스 7:22
- 지혜롭고 경건한 말에 대한 비유 – 골 4:6
본문으로 설정한 마 5:13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할 이야기가 많이 있겠다. 그런데 위에 열거한 28개의 성경구절 중 굳이 몇 개를 인용하고 싶다면 무엇으로 할까? 아니, 어느 구절은 하지 말아야 할까? 본문에 나온 소금의 역할과 관계없는 심판, 저주, 멸망 또는 지명 등과 연관된 구절들을 우선적으로 빼야 할 것이다. 몇 구절을 인용하면 좋을까? 한 구절내지 두 구절. 많이 줄줄이, 그것도 본문과 연결되지 않는 구절까지 인용한다면, 안하니만 못하고 과유불급이 되고 만다. 그렇게 한다고 그 목사가 성경을 많이 안다고 생각할 성도는 없다. 그렇게 한다면 본문의 뜻을 흐리는 효과밖에 없다. 그렇게 한다면 구글의대 졸업한 환자같이 선무당 짓을 하게 된다. 여러가지를 많이 길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을 때 한 단계 올라간 깊은 설교가 나온다.
구글로 소금을 찾아보면 약 1천 8백만개의 글이 나온다. 너무 일반적이기에 범위를 좁히기 위해서 ‘세상의 소금’을 찾아보니 약 2백만개의 글이 나온다. 처음 몇 페이지를 보니 대부분이 본문으로 설정한 성경말씀에 근거한 글들이다. 호기심에 ‘소금은 생명’을 찾아보니 약 1백 5십만개의 글이 나온다. 이 경우에 놀랍게도 사람은 소금물에서 태어났고 엄마 뱃속의 양수와 바닷물은 같은 소금물이라는 논조의 글이 첫 페이지를 채우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설교에 넣어야 할까? 이에 대한 필자의 소견은 앞의 글에서 밝힌 바 있다. 소금에 관해서 약 2천만개 이상의 글이 구글로 발견되는데, 하필이면 사람은 소금에서 태어났다고 설교의 운을 땐다면 숨이 턱 막힐 것이다. 하기 전에 한번만 더 생각하고 안 했다면 좋았을 이야기. 인체의 염분이 생명유지에 꼭 필요한 이유를 말했다면 본문과도 연결되고 좋았으련만. 사람의 오감, 모든 장기와 근육의 움직임을 조절하기위해, 신경조직을 통해서 흐르는 미세전류와 신경세포안에서 이루어지는 원활한 화학작용에 필요한 가장 최적의 소금성분을 인체에 넣어 놓으신 하나님의 신묘막측하신 창조를 강조했더라면 … 참고로 신묘막측(神妙莫測)은 시 139:14의 개역성경 표현이고, 개역개정에는 심히 기묘하다고 되어있다. 필자는 신묘막측이라는 표현이 창조의 신기하고 기묘함이 측량할 수없이 크다는 뜻이 더 강조되어 있어 호감이 간다.
(2018년 4월)
Digestion of information requires intelligent inquiry into contextual meaning of the text, which is the product of serious intellect of a reader. Any superficial intellect gleaned from quick browsing is just that – quick and di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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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not only quick and dirty but also resulted in unendurable babblings in this particular experience. I am saddened to see some pastors prefer quantity(length) over quality(depth) of their ser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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