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틱 크루즈 – 베를린 (1)

첫 번 가항지는 독일의 바르네뮨더(Warnemünde, Mouth of the Warnow)인데 내륙에 있는 베를린으로 가기 위해서 들른 곳이다. 이 곳에서 베를린까지는 약 150 mile (240 Km)인데 차로 보통 2시간 30분정도 걸린다. 그러나 이 날은 배가 여러 척 들어왔고, 그래서 기항지관광을 위한 버스가 여러 대 출발했으며, 고속도로 공사가 여기저기 있어서 거의 4시간이나 걸렸다. 속도제한이 없다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던 독일 고속도로 Autobahn의 배신(?)을 맛본 것이다. 배를 다시 타야 하는 시간적 제약과, 크루즈 배는 늦게 오는 승객을 절대로 기다리지 않기 때문에, 돌아가는 시간도 넉넉하게 잡으니 베를린 관광시간은 점심시간 포함해서 4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래서 원래 계획보다 대폭 축소된 관광일정으로 진행이 되었다.

독일의 역사를 초고속으로 살펴본다. 독일은 고대사회를 거쳐 왕국 및 제국 시대가 있었으며, 900여년동안 신성로마제국의 영향 아래에도 있었다. 19세기 초에 독일연방을 표방했고 19세기 후반에 프러시아의 주도아래 독일제국을 선포하였다. 20세기 초 1차세계대전 후 일어난 독일혁명으로 귀족들이 내 몰리고 공화국이 되었다. 그러나 초대 대통령이 정권을 제대로 유지 못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니 보수파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극도의 혼란과 경제공황을 겪은 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실권을 잡게 되며 극우민족주의로 치닫아 2차세계대전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2차세계대전 후 독일은 포츠담(Potsdamer) 회담에 따라 승전국인 소련, 미국, 영국, 불란서에 의해 4 지역으로 나뉘어 지게 되며, 소련에 속한 부분을 동독, 나머지 부분을 서독이라 부르는 분단의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소련과 서구의 냉전시대가 계속되는 가운데, 미국의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이 1987년에 베를린 장벽에서 한 “Tear down this wall”이라는 세기적인 연설과, 그 후에 이어진 철의 장막(Iron Curtain: 소련이 위성국가들에게 서방국가와의 교류를 철저하게 억제한 정책에 기인한 인위적인 경계)이 와해되며 1989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에 드디어 독일은 통일을 맞이하였다. 그 이듬해인 1991년에 소련도 붕괴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 나뉘어진 독일 (Credit: WikiNight2)

베를린은 왕국과 제국 시대에 줄곧 수도의 자리를 지켜왔는 데 분단된 독일에서는 동독에 속해버리고 말았다. 이 때 베를린 역시 4 승전국에 의해 크게 동서로 나뉘어 지고 그 유명한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다. 동 베를린은 동독의 수도가 되었고 서독은 본(Bonn)을 수도로 세웠다. 통일 독일은 다시 베를린을 수도로 세웠다. 베를린에 도착하여 먼저 들른 곳은 루스트가르텐(Lustgarten, Pleasure Garden)이다. 이 정원은 베를린 중심부를 흐르는 슈프레(Spree) 강에 있는 무지움신세(Museumsinsel, Museum Island)에 있다. 참고로 이 섬의 북쪽은 7개의 박물관들이 모여 있어서 박물관 섬이라 하고 남쪽 끄트머리 부분은 어부의 섬이라고 부른다.

Lustgarten에 도착하니 Altes Museum(Old Museum)과 Berliner Dom(Berlin Cathedral)이 우리를 압도했다.

구 박물관, Altes Museum은 골동품(이 표현은 고리타분한 느낌을 주는데 안티크 – antique – 하면 더 멋있는 것 같다) 위주의 박물관이다. 1830년에 이 박물관은 프러시아 귀족이 수집한 예술품들을 전시하기 위해서 지어졌으며 원래 이름은 Königliches Museum(Royal Museum)이었다. 1845년에 또 하나의 박물관 Neues Museum(New Museum)이 세워진 후 지금의 Altes Museum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후 베를린 시 소유의 오래된 예술품들이 더해지며 명실공히 베를린을 대표하는 안티크 박물관이 되었다.

베를린 구 박물관과 분수
베를린 구 박물관 지붕 왼쪽에 있는 조형물
베를린 구 박물관 입구 오른쪽에 있는 조형물

현재의 베를린 성당, Berliner Dom은 1905년에 지어진 프러시아 연합 복음주의 교회 건물이다. 원래 15세기에 구교 성당으로 세워졌는데 16세기에 루터의 종교개혁을 맞아 루터교에, 그 후에 칼빈교에 속한 때도 있었다. 18세기에 바로크 풍으로 교회 건물을 새로 지었는데 19세기 말에 헐어내고 지금의 르네상스 풍의 교회 건물이 세워졌다. 2차세계대전 때 공습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전쟁 후에 복구되었으며, 공산치하 동독 시절에 안밖으로 많은 훼손이 더해져 현재까지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베를린 성당 전면
베를린 성당 중앙 돔 앞 십자가
베를린 성당 정문 주변

베를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분단 독일과 냉전시대의 상징이 된 베를린 장벽(Berliner Mauer, Berlin Wall)이다. 이 장벽은, 많은 사람들이 동 베를린과 서 베를린 사이에 있던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동독 안에 있던 서 베를린을 완전히 둘러쌓았기에 서 베를린을 마치 섬과 같이 만든 장벽이었다. 2차세계대전 후 앞에서 언급했듯이 독일과 베를린은 동서로 나누어 졌다. 분단 독일 초에 소련의 스탈린은 강경 탄압정책으로 일관했으나 그 뒤를 이은 흐루쇼프(당시 한국에서는 ‘후루시쵸프’라고 했던 기억인데 지금은 이렇게 부르나 보다)는 유화정책을 택했다. 그 결과 동독과 동 베를린 사람들이 대거 서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하니 고육지책으로 나온 것이 장벽이다. 이 장벽에 관련된 사건사고는 너무 많기에 여기서는 그냥 지나간다. 베를린 장벽의 잔재들은 여기저기에 있는데 우리가 간 곳은 Topographie des Terrors(Topography of Terror, 공포의 지형) 앞에 있는 부분이었다.

베를린 장벽과 Topographie des Terrors

유리로 덮여 있는 부분이 Topographie des Terrors인데 나치 시절 친위대 및 소련점령 때 게슈타포 본부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독일의 어두웠던 역사를 조명하는 박물관이다. 쫓기다시피 다니니 들어가 볼 기회가 없어서 아쉬웠다.

길 쪽에서 본 베를린 장벽

이 길로 2불락 정도 쭉 가면 그 유명한 Check Point Charlie가 있다. 장벽이 세워지고 얼마 되지 않아 미국과 소련의 탱크가 대치한 곳이 바로 이 곳이며, 동 베를린을 탈출하려던 청년이 동독군인의 총에 맞아 전 세계가 보는 가운데 죽어간 곳도 바로 이 근처였으며, 영화나 소설에도 많이 등장하였던 Check Point Charlie, 이제는 너무나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우리같이 바쁜 사람들은 발길을 돌려야 하는 곳이 되었다.

장벽이 있던 자리의 표시
장벽 옆에 있는 베를린 최고의 전시장 Gropius Bau
Gropius Bau 건너편에 있는 베를린 시의회 건물과 통일 독일의 초석을 놓은 18세기 프러시아 정치인 Baron vom Stein의 동상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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