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Boston)은 미국 북동부에 대서양을 끼고 있는 매서추세쓰(Massachusetts) 주의 수도이다. 보스턴은 17세기초에 영국에서 온 청교도들이 정착하며 형성된 마을이며 미국독립혁명(American Revolution: 1765 – 1783) 및 독립전쟁(Revolutionary War: 1775 – 1783) 동안 매우 중요한 사건들이 벌어진 역사의 현장이다: Boston Massacre (1770), Boston Tea Party (1773), Paul Revere’s Midnight Ride (1775), Battle of Bunker Hill (1775), Siege of Boston (1775 – 1776).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항구도시 보스턴은 산업, 교육, 문화의 중심지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성장하였다. 특히 보스턴 일대에는 미국의 유서 깊은 대학들이 많이 있어 교육도시로 각광을 받고 있다: Harvard, MIT, Tufts, Boston University, Suffolk University 등.
보스턴이 미국 독립에 끼친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서 앞에 열거한 5개의 사건을 간단하게 설명한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New England의 13개 주에, 영국에서 수입하는 상품들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자, 이를 반대하는 운동이 벌어지며 시작되었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 1770년 보스턴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을 보스턴 시민들이 위협하고 공격하자 영국군이 이들에게 발포하여 5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Boston Massacre이다. 미국에서는 학살이라는 뜻의 massacre라 하지만 영국에서는 Incident on King Street이라 한다니 시각에 따른 온도의 차이가 느껴진다. 군대의 명령체계에 의한 조직적인 발포가 아니었고 생명에 위협을 느낀 일부 병사가 자위수단으로 총을 쏜 것으로 판명되었고, 연관된 8명이 재판을 받아 6명이 무죄 2명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이 사건은 보스턴 시민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당시 중국산 차가 유럽과 미국에서 많은 인기가 있었으며 영국의 East India Company가 이를 영국으로 독점 수입하여 미국으로 독점 수출하고 있었다. 차에 대한 세금이 과도해지자 미국인들은 차 불매운동을 벌이는 한편 밀수도 성행하여 그렇게 대목을 보는 상인들이 생겨났다. 이에 영국은 East India Company가 미국에 직접 차를 팔 수 있게 하였고 또한 세금을 대폭 인하하여 밀수업자보다 싼 값에 차를 팔기 시작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상인들이 1773년에 시민들을 선동하여, 인디언으로 분장하여 보스턴 항에 정박한 영국 배에 실려 있는 차들을 바다에 던져 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를 Boston Tea Party라고 부른다. 이는 북아메리카 대부분의 항구에 차를 싣고 정박한 East India Company 배의 하역작업을 거부하는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매서추세쓰 일대에서 영국군에 대항하기 위해서 Minutemen이라는 시민군이 조직되었다. 이들의 이름은 유사시 1분 이내에 출동이 가능하도록 훈련받고 준비되어 붙여졌다. 이들은 매서추세쓰 지방의회가 있는 Concord에 무기를 은닉하고 있었다. 1775년에 영국군은 의회를 점령하고 시민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를 탐지한 애국투사들이 밤새 말을 달려 지도자와 시민군에게 정보를 전달하게 된다. 그 사건을 애국투사 중 한 명이였던 Paul Rever의 이름으로 Paul Revere’s Midnight Ride라 부르게 되었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시민군은 성공적으로 영국군의 진격을 막았고 그들은 보스턴으로 퇴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필연적으로 미국의 독립전쟁으로 진전되었다.
Paul Revere’s Midnight Ride 직후인1775년에 시민군은 Continental Army(대륙군)라는 이름으로 개편되고 보강되었다. 미국 독립 후 초대 대통령을 지낸 George Washington의 지휘 아래 대륙군은 보스턴을 포위하고 영국군의 이동을 봉쇄하였다. 이에 영국군은 보스턴 항구를 통제하기 위해서 인근의 고지대를 점령하고 요새화 하려는 작전을 세웠다. 이를 눈치챈 대륙군은 Bunker Hill과 Breed’s Hill을 선점하였다. 영국군은 공격을 개시했는데 2번의 공격이 실패로 끝나고 많은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3번째 공격에 비로소 고지를 탈환하였는데 Battle of Bunker Hill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지만 실제로 치열한 전투는 Breed’s Hill에서 있었다고 한다. 대륙군보다 2배이상의 사상자를 낸 영국은 이후의 전투에 좀더 신중하고 많은 병력을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독립전쟁이 시작된 상황에서 대륙군의 보스턴 포위작전 Siege of Boston은 계속되었고 당시 13개 식민지의 군사적 결속이 강화되었다. 다른 지역에서 시민군들이 자원하여 보스턴 지역으로 속속 모여들며 대륙군의 숫자가 늘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시민들로 이루어진 대륙군과 훈련을 받은 정규군과의 차이로 전투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1776년에 영국군은 결국 퇴각을 결정하였고 무사히 철수하게 해주면 보스턴을 파괴하지 않겠다는 서한을 보스턴의 유지들을 통하여 대륙군에 전달하였다. George Washington 은 관등성명이 없는 편지를 수용할 수 없다고 하였지만 실제 영국군이 해상으로 퇴각을 시작하였을 때 대륙군은 공격하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미국의 독립전쟁은 여러 전투를 치렀고, 1781년에 있었던 Siege of Yorktown에서 대륙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1783년에 파리협정에서 대영제국은 식민지 13개 주의 독립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보스턴의 정치성향은 매우 진보적이며 연방하원의원 및 시장직을 100여년동안 민주당이 독점하여 왔다. 바이든의 국경개방 정책을 지지하였고, 불법입국자 및 성소수자에 대한 도피성(Sanctuary City) 정책을 펼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대부분을 반대하며 공권력에 대한 도전을 공공연히 하고 있다. 최근에는 Street Takeover(길을 막고 차를 광폭 운전하며 각종 불법적 행동을 하는 집회)에서 경찰을 습격하고 경찰차를 불지르는 사건이 벌어졌다 – 참고 기사. 또한 친 팔레스타인 시위대가 경찰을 공격하여 경찰 4명이 부상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 참고 기사. 2024 통계로 보스턴 시의 강력범죄율(Violent Crime Rate)은 인구 10만명 당 332.7건으로 전국 평균치인 198.6에 비해 높은 편이다 – 참고 website. 흔히 강력범죄가 가장 많이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시카고의 325.5보다 더 높다는 사실에 필자도 당혹하였다 – 참고 website.
보스턴의 Freedom Trail을 따른 관광은 도심에 자리잡은 Boston Common 근처에서 시작하였다. Boston Common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으로 알려져 있다. 개인 소유의 농경지로 시작하여, 군훈련장, 처형장, 대중 집회 및 공공 연설장 등으로 사용되다 19세기초에 공원으로 정착되었다.





























(2025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