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는 사무엘상 1장부터 4장까지에 등장하는 사사와 제사장 직을 동시에 수행한 인물이다. 그는 목사들이 선호하여 설교에 자주 오르는 제사장이 아니다. 간혹 설교에 인용되지만 주인공이 아니고 사무엘 또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이야기에 조연 정도로 언급되고 만다. 제사장 가문이었지만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삼상 2:33)’라는 여호와의 저주가 임하여 엘리와 두 아들이 모두 한 날에 죽고 며느리까지도 죽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는데 특히나 그들이 제사장이었기에 더 거북한 주제인 것임에 틀림없다. 만일 일반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과 같이 게으르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서 그런 죽음을 맞았다면 좀 더 자주 설교에 등장하지 않을까?
엘리는 두 아들 홉니, 비느하스와 함께 제사장으로 우선 소개가 된다(삼상 1:3). 그리고 등장하는 대목이 삼상 1:9에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고 소개가 된다. 엘리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그의 죽음이다(삼상 4:18).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사하고 하나님의 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은 엘리는 (예의)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의자가 뒤로 넘어지며 목이 부러져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고 되어있다. 개역성경에는 ‘비둔’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이는 뚱뚱하여 움직임이 굼뜨다는 뜻이 있어 ‘비대’보다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엘리는 이미 영적인 감수성을 잃은 상태여서 한나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술에 취한 줄 알았고(삼상 1:12-13), 아이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엘리가 부른 줄 알고 달려갔을 때 두 번이나 자기가 부르지 않았다 하고 그냥 잠 자리로 들어가 누워버린 위인이다(삼상 3:4-7). 엘리가 98세에 죽었고(삼상 4:15) 사사가 된지 40년이 되었다(삼상 4:18)고 기록되어 있으니 한나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 최소 58세였으리라. 그리고 사무엘이 태어나고 아이가 되었으니 12세정도라고 가정하면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엘리는 최소한 70세는 되었으리라. 참고로 70인역에는 엘리가 90세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성경에서 숫자를 너무 따지는 일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여하간 엘리는 이미 나이가 많았었다는 것이 자명하다. 엘리는, 나이가 들어 육신은 쇠잔해져도 깊은 체험을 통해 영적으로 더욱 민감하고 능력 있는 모습과는 반대로, 그저 앉아 있고 잠자기에 바쁜 나태한 모습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의 두 아들들은 또 어떠한가? 제사를 멸시(삼상 2:12-17)하였고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삼상2:22)하는 참으로 불경스러운 죄를 저지르지 않았는가? 혹자는 엘리가 그저 가정교육을 잘 못해서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그가 제사장의 직분을 바쁘게 행하느라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역시 그가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였고 게으르기 때문에 가정교육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영적으로는 둔감해지면서 세상적으로는 교활해져서 편가르기나 하고 부정직하게 자신의 이익 챙기기에 바쁜 이 세대의 타락한 목사들은 엘리, 홉니와 비느하스를 합해놓은 선상에 있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드니 왈칵 서글퍼진다. 아들들의 비행(非行)을 들은 엘리는 훈계(삼상 2:22-25)를 하기는 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음을 알 수 있다. 세월을 허비한 것이다. 급기야는 앞에서 언급했던 여호와의 저주가 그 가문에 떨어졌다. 엘리는 그 저주의 내용을 사무엘을 통해서 다시 들었지만(삼상 3:10-18) 회개하고 적극적으로 두 아들을 훈계하고 바르게 하려 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고도 사무엘이 자라서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선지자로 알게 될 만큼 세월이 흘렀다(삼상 3:19-20). 때에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아벡에서 전쟁이 벌어졌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로부터 진영으로 옮겨왔다(삼상 4:1, 4). 하지만 이스라엘은 대패하였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사하고 언약궤까지도 빼앗기는 참사가 벌어졌다. 언약궤를 실로에서 아벡으로 옮긴 것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다. 제사를 멸시한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단지 전쟁의 승리를 보장해주는 부적 정도로 간주했다는 사실이다(삼상 4:3). 전쟁 중에 황급히 언약궤를 옮겼으니, 또한 홉니와 비느하스의 됨됨이로 미루어 보아, 지켜야 할 성스러운 절차(민 4:1-15)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으리라는 짐작이 쉽게 간다. 여하간 두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은 엘리는 그 자리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고, 만삭이었던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들 이가봇을 낳고 죽고 말았다(삼상 4:19-22). 엘리 가문에 떨어진 비극적인 예언이 성취된 것이었다.
레위기에는 모든 제사의 절차와 제사장에게 주어진 몫을 어떻게 취할 것인지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를 멸시하여 이를 무시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에 손을 대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영적인 상태이다. 영적으로 극단적인 타락을 했기에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이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 하나님과 교통하는 자라면 어찌 감히 그런 일이 가능하였겠는가? 게다가 그들은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까지 하는 파렴치한 죄악도 저질렀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가 여자관계만 깨끗하고 돈 만 떼어먹지 않았으면 (여기에 함축되어 있는 뜻은 영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든) 무슨 문제가 있냐고 하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난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그런 사람들 눈에도 낙제점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 제물에 손을 댄 것은 현대에서는 헌금에 손을 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바쳐진 제물 중 제사장의 몫을 취하는 절차와 양을 지키지 않았다. 제 멋대로 자기의 정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좋은 것으로 취하였다. 이는 목사가 헌금의 사용 용도와 절차를 무시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부정직하게 속여가며 성도들이 바친 헌금을 사용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결과적으로 홉니와 비느하스는 자신들을 포함하여 그 아비와 아내까지 죽음을 당하는 비극을 자초하고야 말았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하나님께서 엘리 집안에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내리지는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아우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들 이가봇을 낳고 죽었다(삼상 4:19-21). 그런데 이가봇에게는 아히둡이라는 형이 있었다(삼상 14:3). 그의 아들, 즉 비느하스의 손자이자 엘리의 증손자인 아히야는 사울 왕 때 실로에서 제사장이 되었다. 아히둡의 또 다른 아들이었던 제사장 아히멜렉(삼상 22:20)은 사울을 피하여 도망하던 다윗을 도운 이유로 사울 휘하의 에돔 사람 도엑에 의해서 그 일가 85명과 함께(삼상 22:18) 살해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중 하나인 아비아달이 살아 남는다. 아비아달은 아들의 이름을 자기의 아버지 이름과 같게 아히멜렉이라 지었는데 그 역시 다윗 왕 때 제사장이 되었다(삼하 8:17). 이 부분에 대해 성경학자들은 이름이 뒤바뀌었느니 누가 아들이고 누가 아버지냐 따지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기록대로 믿으면 된다. 중요한 것은 엘리의 영적 나태함과 게으름, 홉니와 비느하스의 돌이킬 수 없는 죄악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엘리 가문이 제사장 직을 이어가도록 은총을 베푸셨다는 사실이다.
(2015년 10월)
p.s. 이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사실 담임목사로 절대로 하면 안되는 파당을 짓고 교회를 깨고 나가서, 바로 옆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를 고소하고, 아무 이해상관도 없는 새로 온 담임목사까지 고소한 어느 목사로 인해 그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를 떠올리면서 였다. 그런데 연구를 하다 보니 뜻밖에도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 가문에 멸문지화를 내리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제목도 바꾸어 결론을 내리며, 그 목사에게도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p.p.s. 이 글의 동기가 되었던 그 목사의 아름답지 못한 소식을 접하고 크게 실망하였다. 그는 담임하던 교회를 나가서 옆 동네에 교회를 개척하고 어찌어찌 어떤 큰 교회와 연합하여 소위 잘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들려온 소식은 재정적 추문으로 그 교회에서도 쫓겨났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를 추종하여 떠받들고 나갔던 바로 그 사람들에게 당했다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제2의 기회를 이렇게 저버렸다. (2023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