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라는 말같이 아무 생각 없이 이 사람 저 사람 쉽게 쓰는 말도 없는 것 같다. 용서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상대방이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을 주지 않고 너그럽게 보아 줌’이다. 그 뜻을 조금 확대해석하자면 용서를 한다 함은 상대방만이 잘못했을 때 가능하다. 잘못을 저지른 상대방을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함으로 궁극적으로는 깨어졌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용서의 결실이다. 그래서 용서한다는 말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경우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해서, 또한 피조물인 인간들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들을 구원하여 주신 사건이다.
일방적인 용서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뉴스 등을 통해서 보도되었던 일들을 예로 들자면 테러공격으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용서, 취중운전자에 의해 온 가족의 죽음을 격은 가장의 용서 등등 많이 있다. 이런 예에서 특기해야 할 점은 이들 사이에는 사건 전에 인간관계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깨어져버린 관계도 회복해야 할 관계도 없는 것이다. 생면부지에 날벼락같이 아주 일방적으로 일을 당했지만 그 상대방을 용서한 것이다. 성경에도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 17:3-4) 하였는데 정말 대단한 사랑임에 틀림이 없다. 이런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종교인이라면 영적으로 우위에 있는 사람들임이 확실하다. 그런데 인간관계가 형성된 가운데 벌어진 일에서 일방적인 용서란 찾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한 쪽만 잘못한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아니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서로 누가 먼저 또는 누가 더 잘못했느냐 따진다면 결국 조상 탓으로 돌아갈 것이고 용서라는 말이 무색해진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용서했다느니 또는 용서해야 한다고 떠들어대는 사람을 보게 된다. 좀 상황은 다르지만 한국 속담에 ‘똥뀐놈이 성낸다’라는 말이 있다. 잘못은 지가 하고 오히려 상대방에게 길길이 뛰는 모습을 빗대었는데 참 재미있는 표현이다. 잘못한 게 전혀 없지도 않으면서, 아니 모든 정황으로 보아 사실은 더 큰 배반과 잘못을 저지르고도 용서했다고 떠드는 사람이 바로 똥뀐사람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특히 자신은 사람이지 예수가 아니라고 단언했던 사람이 그랬다면 갑자기 예수가 되었다는 말일까? 아니 사람이 예수가 될 수는 절대로 없고 사람을 둘씩이나 죽이고도 안 죽였다고 믿는 OJ Syndrome에 걸린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우위에 있지 않은 사람이 용서한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개나 소나 다 용서했다고 떠드는 꼴이다.
금년 한 해도 저문다. 한 해를 되돌아 보며 결실을 생각하고 감사하며 한 편으로는 반성하고 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참으로 많은 일을 겪었고 관계로 인해 힘든 일도 많이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담대한 믿음으로 지켜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앞에서 인용한 성경구절에서와 같이 용서는 회개로부터 시작된다는 생각이 든다. 진정한 용서는 용서를 구함으로 시작된다.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기가 필요하다. 조상 탓을 하지 않으려면 일방적으로 용서하는 오만함(arrogant)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용서를 구하는 겸허한(humble) 마음이 있어야 하겠다. 주님, 겸허한 마음과 용기를 주세요.
(2015년 11월)
p.s. 11월 11일에 Indiana주 Indianapolis에서 목사사모인 Amanda Blackburn이 강간살해 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열흘 만에 18살밖에 되지 않은 범인과 공범 2명이 검거되었다. 그런데 남편인 Davey Blackburn 목사는 자신의 내면에 일어나는 분노와 증오를 떨쳐버리고 그들을 용서한다고 발표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http://ktla.com/2015/11/23/teen-arrested-in-rape-killing-of-pastors-pregnant-wife-in-indianapolis/ 주님의 사랑 없이는 할 수 없는 용서를 일방적으로 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목사가 있기에 아직 희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