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과 이성

사람은 누구나 감성과 이성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단어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니 정신차리지 않으면 헷갈리게 되어 있다. 두 단어 다 철학적 정의가 있고 일반적 정의가 있는데 여기서는 일반적 정의만 생각해 본다. 감성 – 자극의 변화를 느끼는 능력. 이성 –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을 감각적 능력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결국 이성의 정의는 감성에 상대되는 능력이라는 것이니 감성의 뜻을 먼저 이해해야 하겠다. 감성의 정의에서 말한 자극이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오감(五感, 오각이라고도 한다)을 말하며 시각, 청각, 후각, 미각 및 촉각을 뜻한다. 따라서 아무 생각없이 쓰던 감성이라는 단어에는 놀랍게도 마음으로의 느낌이나 정신적인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정신적인 느낌이나 기분을 뜻하려면 감정이라는 단어가 준비되어 있다. 그런데 ‘감정’하면 뭔가 언짢아 하는 마음이라는 느낌을 주는데 사실은 한자가 서로 다르다 – 感情과 憾情. 우리 말 중 한문에 근거한 단어들은 발음은 같지만 뜻이 다르기에 이렇게 생각할수록 더 골치가 아프고 혼돈이 된다. 반면 영어는 감성이라는 뜻으로 sensibility, 감정으로 emotion, 이성으로 rationality 등등의 단어가 있고 더 머리에 잘 들어오는데 꼭 미국에 오래 살아서 그런 것만 같지는 않다. 이쯤에서 이성의 뜻을 돌이켜 보면 감각적인 것이 아니고 사물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람은 개개인에 따라 감성이 더 발달할 수도 있고 이성이 더 발달할 수도 있다. 균형을 이루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감정이 풍부하면서도 이지적이고 논리적일 수 있다. 그런 사람들과는 예술에 대해서, 감각과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전공분야가 아니더라도 상식적인 선에서 과학에 대해서, 사물의 이치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과의 대화는 재미있고 생산적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를 가르쳐주면 두 셋을 깨우친다. 반면에 감성도 감정도 무디고 사리분별도 흐리멍덩할 수도 있다. 이것은 타고난 천성일 수도 있고 눈치 없고 고집불통 고지식해서 그럴 수도 있다. 무엇을 이야기해도 잘 통하지 않고 이해시키기도 이해하기도 힘들다. 노트도 많이 하고 잘 알았다고 대답하지만 나중에 보면 그렇지 않았고 그 일을 제대로 기억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열을 가르쳐도 하나를 깨우치기가 힘들다. 그래서 대화가 재미 없고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면 날씨 이야기 정도가 고작이다.

미 연합감리교 교단은 신앙과 신학의 원천과 표준으로 성경, 전통, 체험 및 이성 4가지를 꼽는다. 성경이 으뜸으로 그 핵심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전통은 큰 틀로 창세로부터 이어온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활동을 담고 있다. 초대교회 이후 지역, 민족, 세대를 막론하고 복음이 받아들여지고 다시 전수되는 기독교 역사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수 많은 증인들이 생겼고, 신앙고백, 찬양, 강론, 기도, 교회음악 및 교회예술 등을 통하여 구체적이고 다양한 전통이 수립되어 왔다. 이러한 전통 가운데 이루어지는 개개인의 중생을 통한 새로운 삶의 체험은 성경에 담겨있는 살아있는 진리를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한다. 이성은 믿음의 근원이 될 수는 없지만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이성적으로 믿기 위해서 기독교인에게 꼭 필요한 도구이다. 성경말씀과 전통 및 체험을 연결시켜 이해하고 믿으며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에서 나온다. 여기서 체험은 영적 그리고 물리적 체험을 포함한다. 체험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성령의 역사는 꼭 이렇다 하며 광신자가 나오기 십상이다. 자기와 같은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을 깔보기도 한다. 이성을 너무 강조하면 냉랭하고 쌀쌀맞은 사람이 된다. 체험과 이성은 마치 앞에서 말한 감성과 이성같이 균형이 잘 잡혀야 한다. 그래서 체험이 없는 사람을, 가슴이 싸늘한 죽은 사람으로 비유한다. 반대로 체험만 강조하는 사람을, 머리가 뜨거워 열이 있는 아픈 사람으로 비유한다. 우리는 가슴은 뜨겁고 머리는 찬 건강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부모 공경은 부모님의 사랑에 대한 자연적인 반응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님의 사랑을 감성적으로 감정적으로 느끼고 또 그렇게 표현하여야 하겠다. 그래서, 우리 세대의 대다수 부모님들이 그랬 듯이 고생 많이 하시고, 나이 많은 또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물이 핑 돈다. 한편으로는 인륜(人倫)으로 당연한 일이라는 이성적인 자각과 그 당연한 일을 한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 자신 나이가 들고 힘이 들어도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다. 부모 공경에 율법(출 20:12, 레 19:3)을 들이댄다면 이보다 더 율법적이고 무미건조한 일은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무 감성, 무 감정, 무 이성.

(2017년 6월)

p.s. 감성과 이성이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글을 시작했는데 생각나는 대로 자판을 두드리다 보니 potpourri(사전을 보니 문학의 잡집에 해당되는데 맘에 들지 않아 그냥 영어로)같은 글이 되어버렸지만 그대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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