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니다

Blame game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것은 무슨 게임이 아니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고 남을 탓하는 행태를 말한다. 이 blame game의 시조는 아담이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께 아담은 하와가 주어서 먹었다고 대답한다. 그냥 하와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창 3:12)라고 하여 은근히 하나님 탓까지 하는 정황이다. 아담이 요새 말로 또라이인지 아니면 간이 부은 사람인지 고개가 갸웃해진다. 여기서 하나님은 왜 먹었냐고 묻지 않으셨음을 주의하여야 하겠다. 그냥 ‘네,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할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같은 질문을 받은 하와는 뱀 때문에 먹었다고 대답한다. 그래서 인간의 blame game은 시작되었고 우리의 DNA 속에 그 속성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The buck stops here’라는 표현이 있다. 미국의 33대 대통령 Harry Truman이 집무실 책상 위에 써 놓고 즐겨 사용하여 유명해진 이 표현은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뜻이다. 이 말의 유래는 서부개척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카우보이들이 살롱에 모여 포커를 할 때 서로 돌아가며 카드를 나누어 주었다. 소위 deal을 돌아가며 한 것이다. 이때 marker, 즉 dealer의 표시로 사슴 뿔로 만든 손잡이가 달린 주머니 칼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Marker를 다음 사람에게 돌릴 때 ‘pass the buck’이라고 하였다 한다. 여기서 buck은 수사슴을 뜻한다. 원래는 buck horn handle knife인데 다 빼고 buck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The buck stops here는 이렇게 돌리는 것을 자기 앞에서 멈춘다는 뜻인데, 후일에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뜻으로 사용된 표현이다. 2차대전 말기 1945년 4월에 루즈벨트 대통령의 사망으로 당시 부통령이었던 투루만이 대통령 직을 이어받았다. 당시 독일은 이미 항복한 상태였고 일본이 마지막 발악을 하던 때였다. 그는 일본과의 전쟁을 끝냄으로 2차대전을 완전히 종식시킨 원폭투하를 결정하였고, 6.25 동란 때 UN군의 주력군으로 미군 파병을 결정한 장본인이다. 두 결정 다 미국 안밖에서 많은 논란을 낳았지만 The buck stops here로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정치꾼들에게서 보기 힘든 모습으로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Blame game의 대가는 역시 정치꾼들이다. 어떤 정책이 실패했을 때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정치가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가 남의 탓으로 돌리는 모습에 씁쓸한 마음이다. 최근 미국에서 힐러리가 blame game의 대가로 선정되었다. 2016년 대선패배 이후에 좀 잠잠한가 했더니 다시 대중매체를 타며 작년 대선 패배의 원인으로 벼라 별 사람들 탓을 또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많은 평론가들이 힐러리가 너무 자신만만해서 중산층을 무시한 채 새로운 정책 없이 거만하게 선거운동을 한 것이 패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는데도 남의 탓만 하고 있다. 열렬한 지지층을 제외하고 민주당에서도 이제 좀 고만하라는 분위기인데 말이다. 한국은 어떤가? 정치인들은 개인 차원이나 정당 차원이나 책임지는 모습이 없다. 무슨 일만 터지면 서로 손가락질 하기에 급급하다. 대통령이 인기가 있으면 그 밑으로 너나할 것없이 모여든다. 그러다 대통령이 인기가 없어지면 도망가기 바쁘다. 심지어는 출당내지는 탈당을 권고한다. 그리고 정당은 이름을 바꾸거나 둘로 쪼개지거나 그런 일들이 반복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한국의 정당은 관심있는 사람을 빼고는 무슨 당이 어디에 뿌리가 있는지 가늠하기도 힘이 들다. 미국에 양당제도가 자리잡고 약 20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공화당 민주당 이름이 그대로인 것과 참 대조가 된다.

성경에도 책임전가를 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데 구약에서 눈에 띠는 사람은 모세의 형 아론이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출애굽 초기에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여러 날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이 불평하기 시작한다. 아론은 백성들에게 금 귀고리를 모아서 가져오게 하고 불에 녹여 직접 칼로 새겨 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모세가 십계명을 새긴 돌 판을 받아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금 송아지에게 제사를 지내며 노래 부르고 뛰어노는 모습을 보고 아론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다. 이때 아론은 백성들이 신상을 만들라 하여 금을 모아서 불에 넣으니 송아지가 나왔다고 말하고 있다. 자기자신이 백성들에게 명하여 금을 모아서 손수 금 송아지를 만들었는데 백성이 원해서 그것도 금 송아지가 그냥 튀어 나왔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모든 책임은 백성들에게 있다는 책임회피의 치명적인 실수를 한 것이다. 후에 이스라엘의 초대 대제사장으로 또한 모세의 충실한 동역자로 헌신하여 오명을 씻었지만 하나님의 부름에 적극적으로 답하기 전 아론의 모습이었다.

신약에서는 총독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유대인들에게 넘겨주며 물에 손을 씻었다. 그리고 이 일에 자기는 아무 잘못함도 없다고 말하며 모든 책임이 유대인에게 있다고 한다.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인 그는 예수님의 무죄를 알고도 유대인들의 사주를 받은 대제사장의 압력에 굴복하여, 총독으로의 권한과 공정한 재판을 해야 할 직무를 유기하며 그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돌린 것이다. 이에 연유해서 영어로 wash one’s hands of 라는 표현이 생길 정도로 책임회피 및 책임전가의 유명한 케이스가 되었다. 그런 빌라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은 사도신경에 주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고 기록되어 세세토록 그렇게 기억되도록 되고 말았다.

어느 교회와 그 교회의 담임목사를 고소한 목사의 이야기를 최근에 들었다. 자기는 고소할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주변의 목사들이 다 고소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고 사람들에게 말한다고 한다. 책임전가도 이쯤 되면 총독 빌라도 뺨 치게 생겼다. 떳떳하다면 남을 탓할 필요도 없고 핑계도 필요 없이 당당하면 되는 것이다. 무언가 구린 것이 있으니 후진 핑계를 대며 동료 목사들을 한꺼번에 진흙탕으로 끌고 들어가는 모습이 안스럽다. 생각해 보면 그 목사의 말이 사실이라도 문제이고 사실이 아니라 해도 문제다. 아무리 가제는 게 편이라고 하지만 목사들이 교회를 그리고 그 교회의 목사를 고소하겠다는 목사를 말리지 않았겠나? 그래서 그 목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문제라는 것이다. 사실이 아니라면 당연이 거짓말 한 것이니 문제이다. 어쨌든 그 목사는 그런 남 탓에도 불구하고, 빌라도와 같이, 후일 어느 교회와 그 교회의 담임목사를 고소한 목사라고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출애굽기 23장 1절과 2절 말씀이 새삼스럽습니다.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

이런 남 탓과 책임전가에 비해,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사자성어가 있는데 맺을 ‘결’자, 사람 ‘자’자, 풀 ‘해’자, 갈 ‘지’자로 되어 있다. 여기서 갈 지자는 한문에서 음운을 맞추기 위해서 사용된 어조사로 특별한 뜻이 없다. 맺힌 것은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뜻인데 일을 저지른 사람이 남 탓 하지 않고 그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매듭을 진 사람이 그 매듭을 묶은 순서와 반대로 풀어 쉽게 풀리는 방법을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창세기 4장을 읽고 묵상하며 느낀 점들을 정리해 본다. 가인과 아벨이 각각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바쳤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이에 가인이 분하여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다. 아벨은 양을 쳤기에 양의 첫 새끼로 제물을 삼았고, 가인은 농사꾼이라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다고 창세기 4장 3절과 4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는데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 구약에 등장하는 많은 제사의 장면에 동물이 제물로 나오기에, 구약시대 하나님은 동물 제물, 특히 피가 있는 제물을 더 좋아하신다고 해석하는 신학자도 있다. 또는 아벨의 경우 첫 새끼라고 되어있는데 가인의 경우는 그저 땅의 소산이라 기록되어 있어 첫 소산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신학자도 있다. 어떤 신학자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쫓겨 날 때 땅의 저주로 말리암아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오는 가운데 농사를 짓게 되어 순수한 곡물을 수확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아벨의 제사가 가인의 제사보다 더 나았던 이유를 히브리서 저자는 아벨의 제사가 믿음으로 드린 제사였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 4장 9절은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의 행태를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는 장면이다. 가인은 아벨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하고는 한 술 더 떠서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사람이냐고 되 묻는 뻔뻔함을 보이고 있다.

사실 우리 모두는 가인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물론 물리적으로 누구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어떤 일에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적극적으로 접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라는 모습이 없다. 특히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말이다. 동생을, 아니 같은 교회의 교인을 지킨다는 마음이 너무나 없다. 지난 주일에 모 집사님이 안보였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 아니? 주님, 그 구역 구역장도 있는데 제가 그 집사 지키는 사람입니까? 그러면 너희 구역에 아무개 집사는 금년에 한번도 교회에 나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거냐? 아 주님, 그 집사는 주소록에 이름만 있지 원래 교회에 안 나오는 사람이잖아요? 오늘 점심 조인데 남편들은 아침에 좀 일찍 가서 식탁도 놓고 식사 후에 정리도 도와야지? 아니 제가 왜 그걸 합니까? 저는 그일 아니라도 하는 일이 많아요. 이렇게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그런데 이런 것 모두가 내 자신의 모습이다.

성경에서 뒤로 빠져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어려움을 감수하고 자원하여 책임을 떠 맡은 대표적인 인물로 나는 느헤미야를 꼽는다. 느헤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의 후손 중 한 사람이었다.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정복하여 이제는 페르시아 통치하에 있을 때이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이었는데 이는 왕이 마실 술과 음료수를 먼저 맛을 보아 독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별하는 요직이다. 왕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바친 그런 직책이다. 그렇기에 왕비 다음으로 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며 그에 따른 권력과 영화 또한 대단했을 것이다. 느헤미야가 수산 궁에 있던 어느 날 형제 아나니로부터 큰 환난을 당하여 황폐된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느헤미야는 통곡하고 금식하며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였음을 자복하고 일찍이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기도한다. 그리고는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여러 이방인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불과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역사를 이룬다. 도처에 흩어져 살던 유다 백성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이주시키고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했으며 안식일 준수를 선포하여 지금으로 치자면 종교개혁까지 단행하였다. 제사장도 선지자도 아니었던 평신도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황폐한 소식에 왕의 술관원으로의 편안한 삶을 버리고 자원하여 나섰을 때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하심이 함께 하시어 그렇게 큰 일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중학생 때 본 투장 스팔타카스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이 영화는 주전 1세기경에 실제로 있었던 노예 전쟁 중 3번째인 검투사들의 반란을 주제로 한 영화이다. Kirk Douglas가 주인공 Spartacus로 나오는데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던 검투사들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로마군에 패하고 만다. 많은 반란군이 죽고 살아 남은 사람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로마 장군이 포로들에게 반란군 두목인 Spartacus를 내어 주면 십자가 형을 면해주겠다고 말한다. 이에 Kirk Douglas가 일어서서 I am Spartacus! 하고 외치는데 놀랍게도 여기 저기서 검투사들이 일어 서며 내가 바로 Spartacus라고 외친다 – YouTube 동영상. 이에 로마 장군은 모두 십자가 형에 처할 것을 명령한다. 장면이 바뀌고 길 양 옆에 십자가가 줄지어 있고 거기에 십자가 형을 받은 검투사들이 걸려있다. 여주인공 Jean Simmons가 둘 사이에 난 아이를 안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Kirk Douglas의 엷은 미소를 바라보며 마차를 타고 지나가며 영화는 끝이 난다 – YouTube 동영상. 죽음이 뻔이 보이는데도 I am Spartacus! 라고 외친 검투사들, 죽어가는 Kirk Douglas와 이를 바라보는 Jean Simmons의 애절한 모습들이 자꾸 생각이 나서 오랫동안 잠을 설쳤던 기억이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맡긴 양떼를, 주님의 교회를 지킬 자가 누구냐 하고 묻고 계시다. 나는 과연 가인과 같이 저는 아닙니다 하고 답하고 있지 않는지? 아니면 죽음을 무릅쓰고 내가 바로 Spartacus라고 대답한 저 노예포로들 같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죄악됨을 자복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며 모두가 비웃고 훼방할 때,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이루어 낸 느헤미야와 같이 자원하는 심령으로 접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항상 주님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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