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 오슬로 1

오슬로(Oslo)는 노르웨이의 수도이다. 오슬로 일대는 바이킹 시대에 덴마크의 영토였는데 바이킹 시대의 끝 무렵인 11세기 중엽에 오슬로라는 동네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노르웨이 왕 호콘 5세(Haakon V)는 1300년경에 수도를 베르겐(Bergen)에서 오슬로로 옮겼다. 그러나 이어진 덴마크와의 연정(聯政)으로 인해 수도로서의 역할이 미미해졌다. 이러한 현상은 17세기 초에 있었던 여러 번의 화재로 도시 대부분이 소실되며 가속되었다. 마지막 화재가 끝난 1624년에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IV)는 인접한 지역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고 크리스티아니아(Christiania)라 명명하였고 실질적인 수도가 되었다. 1877년에 Kristiania라고 철자를 바꾸었다가 1925년에 비로소 오슬로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오슬로는 오슬로피오르드(Oslofjord)의 북쪽 끝에 위치해 있다. 오슬로피오르드는 네소든(Nesodden) 반도로 인해 동서로 갈라진 형태인데 서쪽만 좁은 해협을 통하여 바다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천혜의 조건으로 오슬로는 잘 보호된 항구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아름다운 산세와 많은 호수들로 유럽의 대도시 중 가장 오염되지 않은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히고 있다.

노르웨이 관광은 발틱 크루즈를 마치고 오슬로를 향하여 코펜하겐에서 overnight ferry를 타고 시작되었다. 약 17시간이나 걸리지만 식당 및 면세점 등의 시설이 좋아 편안한 여행이 되었다. 특히 식당 음식은 큰 크루즈 배에 못하지 않아 만족한 식사를 하였다. 침실은 크루즈 배에 비해 작지만 샤워를 포함한 화장실도 있으니 몇일 밤은 쉽게 보낼 수 있겠다. 코펜하겐을 떠나며 비가 오기 시작하여 북구의 변화무쌍한 날씨를 새삼 느꼈다. 오슬로에 도착하여서도 하늘은 여전히 끄무레하여 사진 역시 우중충 하겠다. 오슬로 항구를 돌아 나오니 바로 오슬로 오페라관이 나타났다.

오슬로 오페라관
오슬로 오페라관 전경 (Source: Erlend Bjoertvedt)

2003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2007년에 완공된 오슬로 국립 오페라관은 1364석 규모의 본연주실을 갖춘 노르웨이 최대의 종합예술관이다. 이태리산 흰 대리석과 화강암으로 구성된 외벽과, 경사진 지붕이 마치 물위로 치솟은 빙산과 같다는 평을 듣는다 한다 – 아래 Hun Ligger 참조. 지붕 위로 나 있는 경사로(ramp)를 따라 올라가면 넓은 광장이 있고 오슬로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경사로에는 중간중간에 계단이 있는데 표시가 되어있지 않아 주의하지 않으면 넘어지기 쉽다.

오슬로 오페라관에서 본 항구의 전경 – 밤새 타고 온 배를 배경으로 Hun Ligger(She Lies)라는 조형물이 보인다
조형물 Hun Ligger(She Lies)

Hun Ligger는 스테인리스 스틸과 유리로 만든 조형물인데 조류에 따라 회전하여 방향을 바꾼다고 한다. Casper David Friedrich의 유화 Sea of Ice를 입체적으로 재해석하여 Monica Bonvicini에 의해 탄생된 이 작품은 2010년에 건립되었다.

Casper David Friedrich의 유화 Sea of Ice

Hun Ligger의 영감이 된 이 그림은 중앙에 있는 거대한 얼음과 좌초된 오른편에 있는 작은 배로 구성되어 있다. 이 배에는 북극 탐험가 폐리(William Edward Parry)가 사용했던 배의 이름 HMS Griper가 기명되어 있다하는데 확대해서 보아도 잘 보이지는 않는다.

오슬로 오페라관 건너편에 있는 복합건물
오슬로 오페라관 오른쪽 뒤편에 있는 Lambda 건물 – 2020년에 뭉크(Munch) 박물관이 들어올 예정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 – 1944)는 노르웨이가 낳은 세계적인 표현주의(Expressionism) 화가이다. 그는 1789점의 그림을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외에도 다수의 판화를 제작하였다. 그의 작품만이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은 그가 살아 있다면 100살이 되었을 1963년에 Tøyen 지역에 개관되었다.

뭉크 박물관 입구

오슬로 시민들은 공원 사이에 있는 이 위치와 건물을 새로 짓는 Lambda 건물보다 더 좋아 한단다. 이곳에는 뭉크의 그림 약 1,200점 및 그에 관한 여러 종류의 자료들이 전시 보관되어 있다. 뭉크가 어렸을 때 어머니와 누나가 폐결핵으로 죽었고 집안에 유전적 정신질환이 있어 그는 염세적이고 우울한 청소년기를 지냈다. 16살에 공대에 입학한 그는 물리학 화학 수학에 탁월하였는데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도 그는 18살에 왕실 예술학교에 입학한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극단적 표현주의(Extreme Impressionism) 또는 예술을 너무 우습게 본다는 등등의 비평에 시달렸다. 죽은 누이의 병상에 영감을 받아 그가 23살 되던 해에 그린 ‘아픈 아이’(Sick Child)는 당시 혹평을 받았지만 후일 그의 ‘영혼의 그림’(Soul Painting)의 시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파리에 머물던 시절에 고갱과 고흐의 영향을 받았고 베를린 시절에는 문학가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그가 39살되던 1902년에 있었던 베를린 전시회가 매체의 호의적인 보도를 받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폭음을 동반한 염세적인 불안장애는 점점 심해져서 1908년에 8개월간 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르렀다. 이 치료 후 그의 작품은 점 더 많은 색상을 담고 비관적인 주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작품은 호평과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삶, 사랑, 우울함, 죽음 및 공포 등을 다루고 있다.

뱀파이어 – 1893년 유화 (Artist: Edvard Munch)

뭉크는 ‘사랑과 아픔’(Love and Pain)이라는 제목으로 비슷한 구도의 그림 6점을 남겼다. 긴 머리의 여인이 남자의 목에 입맞춤하는 이 그림을 뭉크의 미술평론가 친구가 뱀파이어라 부르기 시작하며 작가가 붙인 제목보다 그렇게 더 알려지게 되었다.

죽음과 삶 – 1894년 유화 (Artist: Edvard Munch)

해골과 이를 열정적으로 끼어 안은 나체의 여인을 담은 이 그림은 사랑과 죽음의 은밀한 연계를 암시하고 있다. 오른쪽에 있는 시체를 연상시키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의 대표작 절규에서 완성되었다고 이해된다. 왼쪽에 보이는 난해한 모습들은 확대한 정충(精蟲)들이라 하는데, 생명의 근원과 죽음은 분리할 수 없다는 그의 생각이 집약된 이 그림의 중요한 요소로 꼽히고 있다.

마돈나 – 1894 유화 (Artist: Edvard Munch)

1892년부터 1895년 사이에 뭉크는 마돈나 또는 ‘사랑스러운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비슷한 그림을 여러 장 남겼다. 동정녀 마리아를 반라(半裸)의 여인으로 묘사했다는 데에는 많은 이견(異見)들이 있지만, 그림의 모델이었던 이 여인을 완벽한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여긴 그의 생각을 동정녀 마리아에 비교 표현했다고 이해하고 있다. 여인의 머리 위에 있는 붉은 색의 후광을 동정녀 마리아의 금빛 후광과 견주어 그런 해석이 강조된다. 이 그림에 대한 해석은 너무나 많아 여기에 일일이 소개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하기에 이 정도로,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online으로 연구해 보시기를 …

붓을 들고 있는 자화상 – 1904년 유화 (Artist: Edvard Munch)
절규 – 1910년 템페라화 (Artist: Edvard Munch)

뭉크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꼽히는 절규는 1893년부터 1920년사이에 그려졌다 – 파스텔화 2점, 유화 1점, 템페라화 1점, 그리고 판화 원판 1점과 그것으로 복사한 약 45점. 첫 작품에 붙인 독일어 제목은 자연의 절규, 노르웨이어로 붙인 제목은 비명(Shriek)이었는데 이제는 일반적으로 절규(Scream)로 불린다. 뭉크가 일기에 기술한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과 후일 당시의 영감에 대해 설명한 것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오슬로 피오르드를 끼고 친구와 산책을 하고 있었다. 피곤하고 아플 것만 같아 잠시 난간에 기대어 피오르드 쪽을 보니 석양을 받은 검푸른 바다 위로 핏빛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순간 나는 끝없는 절규가 대자연을 관통하며 울려 퍼지는 것을 느꼈으며 긴장 속에 떨며 그곳에 서있었다.’ 결국 이 그림의 주인공은 자신인 셈이었다. 1910년에 완성된 이 그림은 2004년 백주 대낮에, 위에서 설명한 마돈나와 함께, 복면무장강도들에 의해 탈취되었다. 범인들은 2005년에 잡혔고 그림은 2006년에 회수되었다. 다행히도 큰 손상을 입지 않아 간단한 복구작업 후에 다시 전시되었다.

아픈 아이 – 1925년 유화 (Artist: Edvard Munch)

뭉크는 1885년과 1926년 사이에 같은 제목으로 6점의 그림과 다수의 판화를 남겼다. 뭉크가 특별히 좋아했던 누나가 폐결핵으로 죽으며 받은 고통과 충격은 그의 그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40여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같은 주제를 다른 매체와 기법을 통하여 다루었는데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슬픔과 죽음을 바라보는 공포가 그려져 있다. 의자에 큼직한 베개를 괴고 담요를 덮고 앉아 있는 누나와 그의 손을 잡고 슬픔에 빠져 있는 친척 아줌마의 모습. 병세로 인한 고통 속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누나가 바라보는 오른쪽에 있는 커튼 같은 것은 죽음의 경계선을 상징한다. 죽음을 예상하고 있는 당사자와 간호하는 식구의 모습에서, 뭉크 자신도 폐결핵에 걸렸지만 회복하여 살아남았다는 일종의 죄의식과 슬픔이 얼얼하게 묻어나는 그림이다.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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